LG경제연구원 ‘세계경제 리더십의 변화와 한국경제의 과제’
LG경제연구원 ‘세계경제 리더십의 변화와 한국경제의 과제’
  • 박래정 수석연구위원
  • 승인 2011.10.11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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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호(號)가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던 한국경제. 아프리카 개도국 수준의 국력을 가졌던 저개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동시에 성공해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것은 한국뿐이다. 전쟁에 버금가는 국란이라는 IMF 외환위기도 극복했다. 그러나 글로벌경제의 패러다임이 흔들리는 지금 한국경제가 맞닥트린 위기는 훨씬 구조적이며, 내재적(內在的)이다. 체감하기도 쉽지 않다.

수출주도형, ‘재빠른 추격자’ 모델의 유용성은 한국이 극적으로 입증했다. 디지털 웨이브의 끝자락에 매달려 후발 산업국의 추격을 당하는 입장에서 한국경제가 그 모델의 한계를 보여줄 판이다. 인구고령화,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 정치적 비효율, 남북갈등 등 서로 중층적으로 얽힌 한국적 경제사회 문제는 추격경제의 한계를 더욱 극명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한국경제의 해외수요 원천이자, 경제활동의 안전판이었던 미국경제도 풍랑을 겪고 있다. ‘한강 기적’의 모태가 됐던 국제경제 질서도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거대한 격변을 헤쳐갈 한국경제의 조타수는 어디 있을까.

위기의 해법이 몇 년을 내다보는 단순 경기대책을 넘어서야 할 것은 분명하다. 보다 근본적이고, 경우에 따라선 과거와의 단절까지 불사하는 환골탈태에 가까운 것이 돼야 할 터이다. 그러한 해법들이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결국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한국의 명운은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국경제의 새로운 길> 연재를 시작한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가치 있는 삶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경제적 해법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첫 회는 세계경제 질서의 변화 속에서 한국경제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았다.

1991년 8월 옛 소련 의사당 건물이 공산당을 추종하는 쿠데타 군의 포격을 받아 파괴됐다. 반동 쿠데타 세력은 곧 민주화를 열망하는 군중을 등에 업은 보리스 엘친 대통령에 의해 축출됐지만, 그들이 파괴한 것은 의회 건물뿐만이 아니었다. 정치적 혼돈에 빠진 옛 소련은 이를 계기로 급속히 해체의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소련의 해체는 소련과 체제경쟁을 벌이던 미국에 유일 초강국의 지위를 안겨줬다.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듬해 공화당 정부로부터 대권을 이어받은 클린턴 민주당 정부는 우주공간을 넘나드는 막강한 군사력과 강한 달러를 자신감으로 새로운 글로벌 질서를 세우기 시작한다. 경쟁자였던 소련의 법통을 이어받은 러시아가 실체적인 군사적 라이벌에서 유엔이라는 공적인 국제무대에서의 상임 회원국의 하나로 격하되자 실질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정면으로 도전할 국가는 사라졌다.

미국은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등 국제 경제기구와 다자간 협의체에 대한 예산 및 인사권을 무기로 글로벌 경제에 ‘미국식 DNA’를 심기 시작한다. 때마침 중남미와 러시아 멕시코를 차례로 휩쓴 외환위기가 이들 국가의 저항을 무마시켰고, 미국식 표준이 뼈대가 된 위기대응책이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로 착근됐다. 1990년대 후반 한국의 경제운용 방식이 미국식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단번에 바뀐 것도 이 시기이다. 한국은 국제적으로 ‘외환위기 극복의 우등생’이란 찬사를 얻었지만, 비선진국 진영에서 외국자본에 가장 극적으로 노출된 개방경제로 변했다.

사실 미국 주도의 글로벌 질서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 소련이 사회주의권의 맹주를 자임하며 미국과 경쟁구도를 만들었지만, 소련의 최고 전성기 경제규모라 해도 미국의 60%대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최강의 경제력과 그것이 뒷받침하는 기축통화 발행국이란 우월한 지위, 그리고 미국의 안보우산을 받았던 서유럽 및 일본 자본주의 진영과의 공조를 통해 사회주의권과의 체제경쟁에서 지속적으로 격차를 벌릴 수 있었다.

이 시기 미 경제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그 배경에는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과 생산성 향상이 있었다. 아울러 미국이 국가 경쟁력을 가늠하는 거의 모든 잣대로 세계 최고 경지에 이른 데에는 국가적 위기 때마다 초당적인 견지에서 전 미국인들의 역량을 한 데 결집시켰던 워싱턴 정치문화가 큰 몫을 했다.

1.‘냉전 승리’이후 맞은 미국의 위기

2000년대 중반까지도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질서의 조력자였다. 미국의 맹방인 유럽까지도 찬반으로 들끓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에도 외교적으로는 적극 협력했다. 그러던 중국이 최근 수년 새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이익에 도전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놓고 있다. 예를 들어 올 8월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미국이 재정적자를 줄이는 등 책임 있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미 의회의 위안화 절상요구에 대해서도 ‘지극히 정치적 공세’라고 수년 째 거절해왔다. 러시아의 차기 대통령을 예약해놓은 푸틴 총리는 아예 미국을 겨냥해 “세계경제의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 비난한다.

옛 소련이 무너진 뒤 고작 20년이 지났을 뿐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에 어떤 문제가 생겨난 것일까.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2000년 전 로마 공화정 및 제정 전반기 지중해 세계의 질서였다. 제국을 운영하는 데 있어 국경이란 존재는 걸림돌일 뿐이어서, 로마 원로원은 제국의 영역이 확장될 때마다 가도(街道)를 뚫었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도 국경은 마찬가지 장애물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경제적 면에 국한시킨다면, 미국식(영미식) 경제 가치관 및 경제규범이 주권 경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그 바탕 위에서 국제 경제질서가 운용되는 것이다.

옛 소련의 해체 이후 미국은 우루과이 라운드(UR, 1986)같은 다자간 무역협상 무대는 물론, NAFTA(1994) APEC(1993) ASEM(1996) 등 대륙 간 거대 경제블록까지도 미국적 가치관 및 규범을 확산시키는 방편으로 활용했다. APEC이나 ASEM이 다른 지역블록과 달리 회원국 가입에 있어 ‘개방적인’ 성격을 유지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회원국 간 장벽을 낮출수록 활동 공간이 넓어지고, 결과적으로 지역블록에 속한 국가들 모두 경제적 이득을 거둘 수 있다는 주장이 글로벌시대의 화두가 됐다. 이 흐름에서 가장 큰 수혜를 기대한 쪽은 산업화 및 국제화 경험에서 앞선 미국 등 선진국들이다.

‘강 달러’ 라는 부메랑

문제는 소련의 해체로 미국이 글로벌 경제질서의 새 판을 짜던 1990년대 미국의 산업경쟁력이 반도체 칩이나 바이오, 우주항공, 소프트웨어 등 일부 첨단분야를 제외하면 취약한 상태였다는 데 있었다. 이는 미국의 무역적자가 1970년대 들어 악화하기 시작해 냉전붕괴 이후인 1990년대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던 데서도 나타난다. 미국은 일부 서비스 교역에서만 우월한 경쟁력을 보였을 뿐 상당수 제조업 분야에서 일본 독일 등 후발 산업국에 따라 잡혔다. 경공업뿐 아니라, 철강 전자 자동차 등의 주요 제조업의 무역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간 것이다.

산업경쟁력 약화에 따른 경상수지 적자는 환율조정으로 해소될 수 있다. 즉 달러가치가 하락하면, 미국산 제품의 가격이 하락하고 이를 통해 수출을 늘려 무역수지 적자를 만회하는 환율조정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미 달러화는 이미 1985년 플라자합의에서 대규모 조정(달러화 가치의 인위적 하락)을 통해(당시 합의로 독일 마르크화는 1주 만에 달러화에 대해 약 7%, 일본 엔화는 8% 오르는 등 급등세로 돌아섰다)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확대를 억제한 바 있었다. 그러나 체제경쟁이 종료된 1990년대는 전반적으로 민주당 정부의 ‘강(强) 달러’ 정책기조가 굳건했던 시기였으며, 이는 미 금융자본의 거대화 및 제조부문의 글로벌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금융자본의 거대화는 금융기관의 겸업(兼業)을 통해서 쉽게 실현된다. 투자은행 업무나 소매은행, 보험업무 등의 영역이 분리돼 있다면, 금융기관의 대형화는 한계가 있다. 대공황 이후 전업(專業) 원칙을 지켰던 영국이 금융권의 빅뱅을 도모하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선회한 것은 1986년이었다. 여기에 자극 받아 미 의회도 전업을 규정한 1933년 은행법(Glass Steagall Act)을 1999년 공식 폐지하는 등 겸업화를 통한 대형화를 유도했다. 이 시기 미 금융권의 빅뱅을 상징하는 사례가 바로 시티은행의 모회사인 시티코프(Citi Corp.)와 거대 보험그룹인 트래블러스 그룹의 합병이다. 미국은 제조업 분야에서 잇따른 몰락을 목도하고 있었지만, 금융산업에서만큼은 세계의 돈줄을 쥐고 흔드는 월 가의 경쟁력을 자신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월 가의 금융가들은 원본 금융자산을 바탕으로 다양한 위험을 회피하고 거래하는 파생금융상품(Derivative) 시장을 키움으로써 한층 몸집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미 금융기관들의 다양한 금융상품은 대부분 ‘달러 표시’ 자산이었다. 이를 글로벌시장에 유통시키려면 강 달러 기조가 유리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로버트 루빈이 월 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골드만 삭스 회장 출신이었고, 그의 별칭이 바로 ‘Mr. Dollar’였던 점을 기억해보자.

강 달러는 그러나 미 제조 대기업들의 해외진출을 독려하는 촉매로 작용한다. 미국기업들의 해외 기업 사냥이 손쉬워지는 데다, 중국 등 신흥국 제품의 공세에 맞서 제조사슬을 신흥국으로 옮기려는 유인이 커지기 때문이다. 미 제조업 분야의 글로벌화는 강 달러라는 인프라를 타고 급속히 진전돼 그 결과 미국 내에선 비대해진 금융과 체질이 허약해진 제조업 간의 불일치가 분명해졌으며, 이는 미국 경제의 채무 누증으로 현실화된다.

신자유주의 확대와 트리핀의 ‘경고’

198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신(新)자유주의의 세계경제 버전은 ‘자유무역과 국제분업의 활성화’로 요약된다. 소련 해체 후 유일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으로선 ‘보다 민주적으로’ 국경의 벽을 낮춰 활동공간을 확장하는 글로벌 전략을 펼쳐왔다. 신 자유주의는 1990년대 들어 미국이 시장개방을 압박하는 이론적 토대로 기능했다.

이 시기 국제무대에선 역사상 어느 때보다 다자간 협상테이블을 통한 갖가지 ‘국가조합’이 활발히 거론됐다. 그 대미(大尾)가 바로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다. WTO를 설계했던 미국 등 선진국 진영은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갖가지 견제장치(자국산업 보호규정)를 마련한 뒤 중국의 가입을 승인했다. 중국 등 브릭스(Brics) 국가들은 2001년 미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의 잠재력 예찬 보고서가 나올 때를 전후해 급속히 글로벌경제에 편입됐다. 선진국 금융 및 제조기업으로선 반가울 수밖에 없는 세계사적 흐름이었을 것이다.

신흥경제의 부상은 그러나 국제유동성을 미국 달러에 의존해야 하는 국제통화체제의 태생적 한계를 더욱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달러 기축통화체제에선 국제 거래규모가 커질수록 미국은 달러 유동성을 국제무대에서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이는 곧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확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규모가 커질수록 달러화 가치에 대한 우려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트리핀의 딜레마(Triffin’s Dilemma)이다.

로버트 트리핀 교수가 이 딜레마를 처음 제기했던 1960년대는 미국의 경제규모가 전세계 GDP의 31%를 차지했기에 딜레마는 ‘가능성’으로만 언급됐다. 더욱이 냉전체제의 한 축이었던 사회주의 경제권은 미 달러의 유통범위 밖이었다. 소련의 패퇴 이후 미국의 활동 영역이 과거 사회주의 경제권으로 확장되고 2000년을 전후해 신흥 개도국까지 글로벌 경제의 주요 참여자로 등장하면서 기축통화를 달러에만 의존하는 딜레마는 위기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오늘날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 브릭스 4개국이 창출하는 부가가치 규모(GDP)는 글로벌경제의 25%(2010년 구매력평가 기준)에 달한다. 2000년 규모에 비해 글로벌 비중도 9% 포인트나 높아졌다.

반면 미국의 비중은 같은 기간 24% 에서 19%대로 하락했다. 미국이 글로벌 경제의 팽창에 맞춰 그 비중을 유지해왔다면, 국제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한 경상수지 적자도 경제규모에 맞춰 조절할 수 있기에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글로벌 비중이 작아질수록 유동성 공급의 부담은 미국에 크게 지워질 것이며 달러 중심의 현 국제통화 질서의 안정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동아시아 주변국과 심지어 유럽과 미국의 주요 기업들이 중국으로 제조거점을 이전하면서, 상황은 심각해졌다. 국가 주도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은 수출이란 성장동력을 키우기 위해 위안화를 줄곧 저평가해왔으며,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토대로 미 국채를 매집해왔다. 즉 미국은 실물부문의 적자를 빚을 내(채권발행을 통해) 해결하고, 중국은 실물부문이 거둬들인 흑자를 미국에 빌려주는(미국 채권에 투자하는) 불균형 구조다.

여기에 더해 2000년대 초 미 공화당 정부가 ‘악의 축’을 축출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군사비를 지출하고 감세정책을 밀어 부치면서 재정이란 곳간까지 텅 비게 됐다. 2010년 기준 미 재정적자는 GDP의 10%에 가까워 연방정부 파산을 거론할 정도로 열악하다. 최근 국제신용평가기관의 미국 신용등급 하향조정은 미 연방정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충격을 안겨줬지만, 향후 추가적인 하향 가능성을 점치는 국제 신용평가기관이 더 많다. 미 경제의 장기침체 국면을 반전시킬 수 있는 재정이란 카드를 준비하기엔 부담이 따른다는 의미이다.

우군 진영의 동반 침체

미국 주도의 글로벌 질서에 암운이 드리워진 세 번째 요인으로는 ‘우군진영의 동반약화’를 꼽을 수 있다. 국제경제 및 외교무대에서 전통적으로 서유럽 맹방과 일본은 미국의 의중에 맞춰 충실히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서 조역을 자임했다. 선진국 클럽인 G7이 좋은 본보기이다. 달러화의 급격한 가치하락에 합의했던 1985년 플라자합의도 G7의 초기 버전인 G5 재무장관 회담에서 이뤄졌다. 미국은 광대한 내수시장을 유럽과 일본에 상당부분 내주고, 사회주의권과의 체제경쟁에서도 안보우산을 제공하면서 미국 주도의 글로벌 질서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 경제의 위기국면에 구원투수로 등장할 선수는 이들이 아니다. 일본은 1990년대 거품경제 붕괴와 이어진 재정악화로 장기간 반전의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유럽도 무리한 유로 존 통합의 부작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란 급한 불을 재정투입으로 껐으나, 그 후유증이 최근 남유럽 경제의 파산위기로 불거졌다. 북유럽국가와 남유럽 국가간의 재정통합이 이뤄지지 않는 한 유로 존(Euro Zone)의 미래까지 불투명해졌다. 미국과 유럽이 경기침체와 재정위기를 동시에 겪자 19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을 답습하는 것 아니냐는 불길한 우려가 확산되는 형편이다.

국제경제 무대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G7과 같은 선진국클럽이나 IMF 세계은행 WTO 등 국제기구를 통해 관철된다. G7은 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진 선진국들의 협의 창구이지만, 선진국 경제의 동반침체 때문에 과거보다 위상이 추락했다. 공식 국제기구인 세 기관의 수장은 최대 지분을 가진 미국과 유럽의 사전 조율을 통해 결정되는 만큼 이들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해왔다. 따라서 개도국이나, 체제전환국들의 위기 국면에서는 이들 국제기구의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었지만, 선진국 간 의견조율이 필요한 최근 위기 상황에선 별다른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국제질서가 선진국 진영의 경제침체로 흔들리자 신흥국들의 역할을 주목하는 기대심리가 커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2.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가

WTO 가입 후 중국경제의 부상은 눈부셨다. 개혁개방 이후 성장세를 계속 이어와 충분히 G7급 체격을 갖췄다. 2010년엔 ‘영원한 2위 경제’ 일본마저 제쳤다. 그런 중국이 아직도 G7의 변방에 머물고 있는 것은 시장경제체제(MES)가 아니란 이유에서이다. 다시 말해 미국이 주도하는 선진국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우려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중국을 이제 미국이 서슴없이 G2라 칭하고 있다. 2009년 4차 미중경제전략회의가 끝난 뒤 미국의 관변 경제학자가 G2를 언급한 뒤 선진국에 확산됐다. 선진국의 G2 주장엔 지난 30년 무임승차(Free Riding)해온 중국이 이제 ‘위상에 걸 맞게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론이 깔려있다. 글로벌 불균형의 한 축인 만큼 그 해소도 책임지라는 압박이다. 미국의 의도를 간파한 중국은 ‘인당(Per Capita) 경쟁력은 여전히 개도국’이라며 떨떠름한 분위기이다.

미국의 경제침체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유럽도 재정적자에 발목이 잡히면서, 중국의 버팀목 역할에 거는 기대는 점차 커지고 있다. 과연 미국의 영향력이 점차 퇴조하고, 중국이 그 공백을 메워가는 가버넌스 변화(Shift)가 일어날 수 있을까.

막강해진 규모 경쟁력

먼저 경제력 면에서 중국의 파워를 전망해보자.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2020년 내 중국경제가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G1판(版)’ 전망을 내놓았다. 노동자원 및 에너지자원의 고갈위기 등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의 성장 감속은 예상되지만, 내륙의 광대한 개발수요와 내수시장 성장세 등을 보면 가까운 시일 내 미국을 결국 따라잡을 수 있다는 예상이다.

일본경제가 규모 면에서 미국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는 수퍼 엔고가 진행됐던 1995년 초로서 미국의 71% 정도였다(경상달러 기준). 같은 기준으로 지난해 중국의 GDP가 미국의 40%에 머문 점을 고려하면, 중국에 대한 G2급 기대는 섣부른 데다 일본의 과거와 비교해도 편파적인 면이 있다. 다만 과거 엔화가 1980년대부터 지속적인 절상기를 거쳤던 사실을 되살려보면, 중국도 저평가된 위안화가 절상세를 이어갈 경우 지금보다 경제규모가 단박에 커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덩치만 커지는 것이 아니다. 실물경제의 파워를 좌우하는 산업 경쟁력 면에서 중국은 일취월장하고 있다. 경공업에서 시작된 산업화는 전자 IT산업을 넘어 자동차 조선 분야로 확산돼 대부분의 전통산업 분야에서 중국은 ‘세계의 공장’ 위상을 굳게 다졌다. 중국 공산당은 여세를 몰아 세계 각국이 최근 출사표를 던진 차세대 산업에서도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려 획기적인 육성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중국이 올해부터 시행하고 있는 ‘12차 5개년 규획’의 산업정책 버전은 ‘7대 전략적 신흥산업’ 육성이다. 여기에는 신에너지, 전기차, 지능형 전력망 등 선진국 경제의 차세대 성장동력이 다수 포함됐는데, 모두 초창기 정부지원과 규모의 경제성이 산업체인 형성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평가된다. 두 가지 모두 중국이 비교우위를 가졌다는 데 이견이 없다. 필요한 첨단기술은 정부가 R&D를 주도하거나, 외국 기업 유치나 해외 M&A 등으로 우회 돌파한다는 복안이다.

덩치가 큰 중국경제는 글로벌 표준전쟁에서 유리하다. 중국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선진국 경제에서 확립된 산업 표준을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자국 표준으로 이식시켜왔다. 이른바, 재빠른 추격자의 비용절감형 Catch-Up 효과다. 유선을 깔지 않고, 무선전화 시대로 곧바로 넘어간 것이 대표적이다. 인터넷도 초고속 유선망에 투자하느니, 무선인터넷으로 곧바로 넘어갈 기세다. 중국 산업계의 공룡들은 대부분 정부가 대주주인 국유기업들이다. 이들은 자사 이기주의에 매몰된 선진국 기업과 달리 국가적 산업정책 목표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글로벌 표준다툼에서 중국 국익을 지키는 첨병이 되는 것이다.

더딘 위안화 국제화

금융부문에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실물부문의 덩치가 커진 데 비례해 중국 금융부문도 덩치를 키우는 데에는 성과를 냈다. 중국 5대 국유상업은행의 하나인 건설은행은 시가총액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이다(올 6월 말 기준). 자산규모로 따질 때 중국 5대 은행들의 글로벌 랭킹은 대부분 10위권 밖이지만, 순익규모 면에선 공상 건설 중국 농업은행 등이 모두 5위권 내 들었다(2010년 말 기준). 여윳돈이 생기자, 국제시장에서 곧바로 큰 손으로 부상하고 있다. 올 상반기 한국 국채를 매집한 핵심 투자자그룹이 바로 중국 은행들이다. 이들은 자국 대형 국유기업들의 해외 인수전에서도 우군으로 자처하고 있어 중국 경제의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 핵심 인프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부실채권(NPL) 대란 우려까지 낳았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만하다.

그러나 국제 금융계를 주름잡는 미국 금융파워엔 아직도 못 당한다. 무엇보다 위안화 국제화가 더디다. 무역결제용으로 쓰이는 위안화 규모는 2009년 중국 외환당국의 자유화 조치로 크게 늘었다. 올 2분기 위안화 결제무역액은 5,973억 위안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전년 동기에 비해 10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전적으로 동아시아 권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부품 및 반제품의 역내 무역이 크게 활성화된 덕택이다.

위안화의 파워는 여기까지이다. 투자수단으로서의 매력도는 형편없이 떨어진다. 수출대금으로 위안화를 받았다 해도 이를 운용할 수 있는 금융상품이 태부족인데다, 위안화 환리스크를 회피할 수 있는 파생금융상품 시장도 발달되어 있지 않다. 금융부문에서의 위안화 위상은 미국 달러화는 물론 유로나 엔화와 비교조차 힘들다. 이는 중국 정부가 거시정책의 독립성과 재량권을 훼손시키지 않으려 매우 완만하게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있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중국이 미국처럼 기축 통화국으로서 국제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무역수지 적자를 용인한다는 선택은 불가능하다. 중국 공산당도 내수확대와 경상수지 균형 목표를 천명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점진적이고 장기적인 목표이다.

저우샤오촨(周小川) 중국인민은행장은 2009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고조될 때 ‘달러의 패권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인민은행의 미 국채 보유액도 줄여나가고 있다. 그러나 국제경제 무대에서 중국의 발언은 여전히 수세적인 국면에 머물고 있으며, 이는 실물부문보다 크게 뒤처진 금융부문의 파워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 이는 어느 정도 중국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다.

‘중국 성장모델’의 리더십

미국이 주도해온 국제질서는 경제적 파워와 군사력만으로 구축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권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 새 질서를 형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시장경제의 상부구조를 이룬 민주주의적 가치관이 크게 기여했다. 같은 가치관을 공유한 서구와 일본의 공조를 이끌기도 좋았고, 개인의 창의와 생산성을 끌어올려 경제적 성과로 연결시키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전파 확산하는 데 강한 리더십을 과시해왔으며, 그 수단으로서 유엔 등 국제기구를 적절히 활용해왔다. 2003년 이라크에 대한 군사작전을 둘러싸고 부시 공화당 정부가 유엔무대에서 유럽 맹방과 상당한 내홍을 겪었으나 오바마 행정부 들어 씻은 듯 봉합됐다. 미국적 가치관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가 탄탄한 것은 역사적 종교적인 배경이 비슷한 데다 체제경쟁에서 승리한 성공체험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은 이러한 미국식 가치관 리더십으로 볼 때 이방인 같은 존재이다. 서방세계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상인 및 자본가 계층이 중심이 돼 각종 권리투쟁에서 성공하고 이 권리들이 기본권으로 정착되면서 발전해왔다. 반면 중국의 시장경제는 민영기업들의 권리투쟁과 거리가 먼,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명운을 건 공산당 지도부의 야심 찬 개혁개방 노선에 따라 ‘위로부터’ 주어졌다.

따라서 서방세계의 신성불가침한 기본권은 중국에선 ‘국가적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유보될 수 있다. 중국은 30년 동안 시장경제를 확대하면서 민영부문의 자율권을 신장시켜왔지만, 여전히 ‘사회주의시장경제 건설’이란 국가 목표가 최상위에 놓여있다. ‘인민의 장기적인 공통권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천부 인권 조차도 억제될 수 있다. 중국 사회체제의 특이성을 새삼 일깨운 사람이 바로 지난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劉曉波)였다. 류는 중국 체제에서는 확정 판결을 받은 ‘중범죄자’로서 중국인들의 대중적 지지는 취약하다.

중국적 가치관에 기반한 국가주도형 성장모델도 적어도 현재까진 상당한 효율성을 과시해왔다. 성장에 필요한 자원을 집중시켜 높은 효율을 올리거나, 정치 낭비를 제거할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선진국을 빠르게 추격해온 산업정책도 중국식 국가주도형 성장모델에서 빛을 발했다. 중국 성장모델의 비판적 지지자들은 그 특징을 ‘강한 국가, 약한 사회’로 압축한다. 서방이 주장하는 민주주의 부재론(不在論)도 인정하지만, ‘장기적이고 전면적인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해’ 발전단계에 맞춰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는 신장되는 것이라고 변호하고 있다.

문제는 중국식 성장모델의 한계가 세대를 넘어서면서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말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중국 사회에선 민간파워보다 국가 및 당의 파워가 강해지는 국부민궁(國富民窮), 국진민퇴(國進民退) 현상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대규모 재정을 푸는 과정에서 국유기업의 민영기업 사재기나, 부동산 투자가 극성을 부려 가뜩 사정이 어려운 민영경제와 좋은 대비가 됐다.

중국 공산당은 당 내 민주화로 중국식 모델의 문제를 넘어서려 한다. 후진타오(胡錦濤) 공산당 총서기 등이 민주화를 말하는 것은 일당독재의 전제 위에서다. 권력의 속성 상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민주주의는 대단히 어려운 사회적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국가 과잉현상은 중국경제의 고도화에 필수적인 민간부문의 혁신 에너지를 키우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중국 젊은 세대들은 선대와 달리 경제적 어려움을 별로 겪지 않았다.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이 강한 요즘 세대들을 중국 사회는 신신인류(新新人類)라고 부른다. 이들이 언제까지 중국식 성장모델의 지지자로 남을지 미지수다. 중국 경제가 감속성장 국면에 들어선 뒤 위기가 올 수 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중국모델이 국제적으로 전파되고 미국 같은 국제적 지지와 리더십을 얻게 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중국 정부가 자국 모델의 해외이식에 신중하다. 류의 노벨상 수상을 서방의 내정간섭으로 간주하는 중국으로선 자국 모델의 효용성을 다른 나라, 이를테면 개도국에 설파할 경우 논리적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자국 실정에 맞는 국가운영 방식’을 주창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3. 향후 국제질서와 한국경제의 과제

미국 경제가 단기간 회복세로 돌아서기는 쉽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했던 원인(遠因)인 금융부문의 과잉은 디레버리징(de-leveraging) 움직임으로 점진적으로 해소될 수 있으나, 실물 부문의 경쟁력 회복은 그 때문에라도 단기간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실물부문 회복을 견인할 재정도 신용평가기관의 ‘1차 경고’를 받은 만큼 적극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다. 무엇보다 과거 국가적 위기에서 나타났던 초당적 협력의 전통을 살리지 못해 미 경제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고 있다.

그러나 미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미국 주도의 경제질서가 눈에 띄게 퇴조한다고 단언하는 것은 무리다. 무엇보다 미국의 기축통화 발행국이란 지위는 흔들리지 않고 있으며 현재 이를 넘볼 나라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전무하다. 과거 영국이 미국에 기축통화발행국의 지위를 넘겨줄 때 영국의 경제력은 미국에 역전돼 30% 수준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유럽 전역을 전장(戰場)으로 만든 양차 세계대전이 기축통화국 지위를 신대륙으로 넘기는 데 일조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2류국’으로 낙오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달러 신인도 하락을 무릅쓰더라도 대규모 달러 찍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미 연준이 1, 2차 양적 완화에 나섰던 최근 2년 새 국제 금융시장의 혼란기에서 오히려 달러강세가 나타났다. 달러가치가 희석되는 양적 완화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금 다음으로 안전한 자산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다만 장기적으로 달러 가치가 조정될 수 있다. 특히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의 배경이 된 중국 위안화와의 교환비율이 조정될 가능성이 높다. 현 글로벌 경제의 최대 불확실성 요인인 미국과 중국의 무역수지 불균형은 간단히 말해 ‘미국이 버는 것보다 많이 썼고, 중국이 버는 것만큼 쓰지 않아서’ 생긴 문제다. 위기가 표면화한 이후 미국은 적게 쓰고, 중국은 더 많이 쓰는 해법에 각기 매달리고 있는데, 이를 유도하는 효과적 장치 중 하나가 바로 위안-달러 환율의 하락, 즉 위안화 절상이다.

2005년 이후 중국은 위안화 환율을 상하이 외환시장에 맡겨두고 있지만, 무역수지가 대규모 흑자를 올리는데도 위안화 환율이 매우 완만하게 하향세(가치상승)을 유지해온 것은 중국 외환당국의 ‘관리’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최근 미 의회는 중국의 환율조작 혐의에 대해 통상보복을 가할 수 있는 법안 통과를 서두르고 있다. 이러한 강공과 함께 국제경제 무대에서 중국의 영향력 제고를 용인하는 당근을 병행할 것이다. 지난해 IMF 이사회가 중국 지분을 상향 조정해 개도국 진영의 발언권을 다소나마 강화하도록 용인한 것도 이 같은 흐름의 첫 단추를 꿴 것일 수 있다.

유럽 재정위기 국면에서도 중국의 역할이 기대된다. 막대한 외화자금 중 일부를 덜어내 파산위기에 빠진 유럽 국가들의 채권을 사주며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 유럽 진영의 SOS를 받아둔 중국으로선 다양한 옵션을 저울질하고 있을 것이다. 유럽진영이 중국에 거부해온 시장경제지위(MES)나, 중국을 타깃으로 수시로 발동해온 반덤핑공세 자제 등 경제적 반대급부 외에 인권 이슈 등 외교적 반대급부도 요구할 수 있다. 미국도 채무조정을 겪고 있으나 미국은 자국의 주도권이 훼손되는 것을 허용하면서까지 중국 등의 발언권 강화를 방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유럽과 달리 기축통화 발행국이란 지위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위안화가 중장기적으로 강세의 흐름을 탄다면, 달러의 역할을 분담할 수도 있다. 위안화 무역블록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중국이 이 지역블록 내에서 충분한 수요시장을 제공한다면 위안화의 역할은 더욱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수출이라는 성장동력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만큼 중국 공산당으로선 적절한 시기를 봐서 선택할 수 있는 중장기 카드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의 선택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경제질서의 판이 뒤집히는, 기존의 흐름이 뒤바뀌는 격변은 가까운 시일에 나타나기 어렵다. 다만 글로벌 위기 이전보다 미국의 주도력은 적잖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미 경제의 체질 약화와 유럽 일본 등 ‘조역’들의 재정악화 탓이다.

반면 중국 등 거대 신흥경제권의 국제적 발언권은 계속 강화되고 있으며 향후에도 이들의 국제적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는 데 이견은 없다. 그렇지만, 글로벌 경제질서를 주도할 만한 체력과 위상을 확보한 것이 아닌 만큼 여전히 미국 등 선진권의 암묵적 동의와 협조가 필요하다.

이 같은 미래를 상정한다면, ‘한국경제의 글로벌 전략’도 기존 흐름의 연장선에 머물기보다 점진적인 노선 조정이 불가피하다. 먼저 중국의 위상강화가 글로벌 차원에선 완만하게 진행되더라도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 지역 블록에선 더욱 빨리 진행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한국 경제규모의 6배가 넘는 대국이 1,000㎞ 옆에서 급격한 경제 사회발전을 이루며, 국제적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글로벌 영역에서 나타나는 중국의 ‘평균적인’ 위상 변화 속도에 맞추다 보면, 중국의 대국굴기(大國?起)는 기회요인보다도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은 2004년 아세안과의 자유무역협상이나 2009년 대만과의 포괄적경제협력(ECFA) 협상에서 파격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자국시장을 열었다. 두 경제권을 대륙과 묶어 ‘대중화 경제권’을 확대하기 위한 포석이자, 대만과는 장기적으로 정치 통합도 노린 다목적 카드란 분석이다. 아울러 2009년부터 전면적인 위안화 무역결제를 허용,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분업구조를 무기로 위안화 블록을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중국 경제가 안정적으로 적정성장을 지속하고, 이에 따라 중국 외환당국의 개혁조치가 이뤄진다면 장기적으로 위안화는 달러의 역할을 이 지역에서 상당 부분 대체할 수도 있다.

1992년 수교 직후부터 중국과 제조 분업구조를 발전시켜온 한국경제는 이제 해외 수요의 상당부분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전체 수출 중 차지하는 중국의 비중이 25%에 이른다(홍콩 제외). 반면 중국의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한국산 상품의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한국은 지난해 453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중국과의 교역에서 올리는 등 2000년대 들어 수백억 달러의 대중 무역흑자 기조를 정착시켰다. 이 상황에서 무역 의존성 격차는 중국의 통상압력을 더 무겁게 받아들이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최근 정부간 사전 조율이 진행 중인 한중 FTA는 이 점에서 운용하기에 따라 한국경제에 독이 될 수도, 득이 될 수도 있다. FTA를 통한 경제통합 가속화는 중국 내수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키우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이는 한국의 산업 경쟁력이 지속적으로 중국에 부가가치를 줄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또 중국 시장은 한국이 그 동안 체결해온 FTA 대상국과는 체제운영 원칙이 크게 달라 세심한 협상이 절실하다. 위안화 국제화 흐름의 단계별로 환 거래비용과 리스크를 줄이는 대응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군사력은 글로벌 경제질서를 주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이다. 최근 중국은 미국의 봉쇄전략을 넘어서기 위한 팽창 노선을 조심스럽게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의 우주전쟁을 상정한 무인위성 미사일 요격실험이나 대양(大洋)해군의 출발점인 항공모함의 취역, 스텔스 폭격기의 개발 등이 좋은 사례이다. 미국은 반면 중국의 팽창을 일본 및 한국과의 공조를 통해 제어하려 한다. 중국 일본 간의 조어도(釣魚島)영유권 분쟁에서 미국이 암묵적으로 일본을 지지하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중국은 이런 흐름에 맞서, 최근 관영 언론매체가 주도적으로 제한적인 무력사용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현 외교노선인 화평굴기(和平?起)조차 필요에 따라선 폐기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지난해 천안함 및 연평도 사건 등 한반도의 남북대치 국면에서 중국은 미국의 항공모함 파견에 강하게 항의했다. 중국 봉쇄전략의 연장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갈등의 한 당사자인 한국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최근 중국인들의 한국 호감도가 하락한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경제적으로 중국 의존도가 높아가는 상황에서 군사안보적으로 중국과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 자체가 리스크 요인이다. 한반도 지역현안에서 갈등 당사국에 머무는 한 이러한 모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만큼 근원적으로는 남북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역량을 갖춰야 할 것이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G20 무대는 사실 글로벌 경제질서에서의 미국 주도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G7만의 배타적 의견조율로는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는 현실은 중국 인도 브라질 한국 등 신흥경제국의 목소리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후 G20 무대가 효과적인 위기 극복책을 내놓지 못함에 따라 개도국 역시 아직 글로벌 경제질서를 이끌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미래 세계경제는 선진국은 물론 덩치를 불려가는 신흥 경제국 간의 협조게임 양상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선진국 경제의 초입에 들어선 한국경제로선 양자간의 매개 역을 자임함으로써 국제무대에서 활동공간을 넓히는 지혜가 절실하다.[LG경제연구원 박래정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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