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미국 혁신적 연구의 산실 DARPA’
LG경제연구원, ‘미국 혁신적 연구의 산실 DARPA’
  • 진석용 책임연구원
  • 승인 2013.07.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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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이 중요하지 않았던 시기는 없었겠지만 특히 요즘 한국에서는 혁신적 연구, 융복합 연구 개발 문제가 주요 관심사다. 기업 입장에서는 중국 등 신흥국 기업들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역량 확보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고 국가 차원에서도 저성장 환경을 극복할 성장 동력 마련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제는 과거처럼 특정 분야에서만 전문화된 기술, 제품보다 융복합적이면서도 혁신적인 기술이나 제품의 연구 개발이 필수적이라는 점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경험과 자료의 축적, 연구 기반 마련 등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이슈 중 하나는 혁신적이면서 융복합적인 기술, 제품의 연구와 개발을 주도할 주체가 아직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또한 연구 주체가 갖춰야 할 역량, 조직 구조와 운영 방안 등에 대한 논의도 아직 미진해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미래 이슈를 선도적으로 규명하고 학계의 기초 기술과 산업계의 사업화 역량 간의 간극을 메워옴으로써 국가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해온 미국의 DARPA(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DARPA, 미국의 혁신·융복합 연구의 구심점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절감해온 미국은 1950년대 과학 정책의 추진체가 될 독립 연구 조직 DARPA를 국방부 산하 기구로 발족했다. DARPA의 설립 목적은 국가 경쟁력의 기반인 미국의 과학 기술적 우위를 강화하는 것이다. 설립 이후 줄곧 DARPA는 미국의 혁신 연구 생태계에서 대학, 기업, 정부를 연결하는 Hub이자 혁신적 연구의 산실 역할을 수행해 왔다. DARPA는 미국의 혁신적 연구, 기술의 실용화, 민간 부문의 발전 등의 측면에서 크게 기여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혁신적인 융복합 연구 주도

미국의 혁신적 연구 지원 기관으로는 DARPA 외에 NSF(National Science Foundation, 국립과학재단), NIH(National Institute of Health) 등도 있다. 그런데 NSF는 기초 과학(자연 과학 및 사회 과학)을, NIH는 의료 관련 분야를 지원해서 학문별 구분이 뚜렷한 반면, 용도에 적합한 기술의 구현을 추구하는 DARPA의 연구 과제는 그 속성상 다양한 분야가 접목된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y)가 많은 편이다. 미국 내 학제간 연구의 제도적 시초도 1959년 ‘학제간 연구소(Inter-Disciplinary Laboratories, IDL)’란 명칭으로 여러 대학들의 연구소를 지원한 DARPA의 신소재 연구 프로그램이었다.

첨단 기술 실용화의 첨병

군사, 민간 분야를 막론하고 잠재적 수요가 예상되는 우수한 연구 과제를 발굴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DARPA의 연구 과제들은 단순 아이디어 수준이 아닌, 기술적 구현을 통한 제품화를 지향한다. 따라서 많은 연구 과제들이 짧게는 수년 이내에 제품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례로는 1960년대에 연구된 컴퓨터용 마우스와 인터넷, 2000년대 초반의 연구 과제였던 Siri 등이 있다.

그래서 DARPA는 이미 1950년대부터 기존 시장의 판도를 바꿀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혁신을 뜻하는 ‘Disruptive Innovation’을 이미 오래 전부터 추진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간 분야의 기술 개발, 경쟁력 향상에도 크게 기여

DARPA는 설립 초기부터 민간 부문의 연구 개발에도 기여해 왔다. 연방 정부가 국가 전략적 차원에서 DARPA의 연구 방향을 조정해 왔기 때문이다.

군사 기술 개발에 치중하리란 일반적 인식과 달리 DARPA의 연구에서 민간 부문의 비중은 큰 편이다. DARPA의 전체 프로그램 중 민간 분야 연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 약 40% 수준에서 산업 경쟁력 향상이 중시된 1990년대 이후에는 50%로 늘어났다.

DARPA의 혁신적 성과들

학계와 산업계를 잇는 가교 역할

설립 이후 줄곧 DARPA는 미국의 혁신 연구 생태계에서 Hub이자 산실 역할을 수행해 왔다. 관련 연구 시설을 직접 보유하거나 운영하지는 않지만 해당 과제의 연구를 총지휘할 수 있는 우수 인재를 영입하고 각종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대학, 연구소, 기업의 개발 조직 등에 연구 자금 지원, 정보 교류, 연구 네트워크 형성 등을 촉진함으로써 기술의 구현을 촉진해 온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역할과 중점 지원 대상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바뀌었다. 기초 연구 지원에 집중한 설립 초기에는 학제간 연구를 위해 대학 등 학계를 주요 지원 대상으로 삼다가 사회적으로 산업 경쟁력이 중시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는 기업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민군 겸용 기술(Dual-use Technology) 연구의 Hub 역할에 더 집중했다. 당시 노력의 일환은 ARPA가 주관하고 IBM, Intel, AT&T 등 주요 IT 기업들이 참여했던 민관 합동 반도체 연구 개발 컨소시엄인 SEMATECH 발족(1988년) 등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DARPA는 ‘Bridging the Gap’이란 기치를 내걸고 미국의 혁신적 연구 생태계에서 기초 연구를 담당하는 대학, 민간 연구소 등의 학계와 제품 출시를 담당하는 산업계를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NSF, NIH, ONR 등이 기초 연구를 지원하는 데에 반해, DARPA는 기초 연구의 결과로 얻은 새로운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활동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 결과, DARPA의 연구 프로그램들은 Google 등 혁신적인 제품 개발을 추진하는 기업들의 선진 개발(Advanced Development)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대표적 사례로는 Google의 자율 주행 자동차 개발 프로젝트와 Apple의 인공 지능 SW인 Siri를 들 수 있다. Google의 프로젝트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3차례에 걸쳐 개최된 DARPA의 무인 자동차 경주 대회(Grand/Urban Challenge)에서 우승한 스탠포드 대학팀(Stanley)의 연구 성과가 Google의 X Lab에서 후속 개발되고 있는 경우이다. Apple이 아이폰 4S부터 상용화한 Siri는 DARPA가 지원한 인지 기능 강화 SW 연구 프로그램이었던 CALO(2003년)의 Spin-off 기술로 알려진다.

첨단 제품의 사업화, 혁신 연구의 확산에 크게 기여

DARPA의 많은 연구 결과들이 방산 업체나 민간 기업들을 통해 다양한 사업으로 발전했다.

다양한 레이더 시스템과 각종 우주 탐사용 로켓, 저탐지(스텔스)성 항공기, Global Hawk와 같은 무인 항공기 등은 군사 분야에서 실용화에 성공한 사례들이다. 민간 분야에서는 마우스, 인터넷, GPS, Google Map, PACS, DDoS 방어 시스템 등이 성공적으로 상업화된 결과물들이다. 특히 인터넷, GPS 등은 군사 분야의 기술이 민간 산업으로 확산된 경우들이다.

때로는 기술의 필요성과 사업적 가능성에 주목한 DARPA가 직접 기업을 설득해서 사업화하기도 한다. GE의 Digital X-ray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미래의 시장성을 내다본 DARPA의 프로그램 매니저가 사업화에 대해 부정적인 최고 경영진을 설득시켜서 제품 개발을 독려하고 결국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이 기술은 이후 유일하게 FDA의 승인을 획득한 디지털 유방암 검사 기기(Mammographic Digital Detector)로도 발전했다.

미국 연방 정부가 유사한 전략적 연구 기구들을 확대, 설치한 것은 DARPA의 또 다른 성과이다. ‘DARPA Model’이라 불린 DARPA의 연구 방식이 유사한 전략적 연구조직 설립의 모태가 된 것이다. 미국 국토안보부(Dept. of Homeland Security)의 HSARPA(2002년), ODNI(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의 IARPA(2006년), 미국 에너지부(Dept. of Energy)의 ARPA-E(2009년)는 각각 활동 분야만 다를 뿐이지 조직 명칭, 설립 목적, 조직 구조와 운영 방식 등은 DARPA를 그대로 모방한 기구들이다. 또한 유사한 연구 기관들을 통해 미국의 혁신 연구 생태계가 확장, 다원화된 점도 부수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기여를 인정받은 결과, DARPA는 우수 인재 영입을 위해 자격 요건, 인원 수, 대우 조건 등에서 정부의 제도적 특례를 적용 받고 있다.

DARPA-hard Niche 과제에 집중

DARPA는 ‘DARPA-hard Niche’의 영역에 속하는 과제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DARPA-hard Niche란 국가 전략 또는 산업 경쟁력 차원에서 아주 중요하지만 개발 실패의 위험성도 커서 대학, 기업 등 민간 연구 조직에서 다루기 힘든, 즉 DARPA만이 다룰 수 있는 주제를 의미한다.

이에 해당되는 연구 과제들은 3가지 특성을 가졌다. 첫째, High Risk and High Pay-off의 성향을 지닌다. 즉 성공할 경우 획기적인 수혜를 기대할 수 있지만 기술적인 실패의 위험도 크다. 둘째, 과제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가 혁신적이다. 공정 혁신이 아니라 근본적인 개념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발상인 것이다. 셋째, 가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 장기성 연구인 기초 연구와 근시일 내에 발생할 수 있는 수요 간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기술이다.

이런 특성을 가진 DARPA의 연구 과제들은 DARPA, 국방부(Dept. of Defense), 에너지부 등 관련 부처의 RDT&E(Research, Development, Test, Evaluation)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검증, 구현되고 최종적으로 실용화에 성공하는 경우, 양산 제품화된다.

성과의 원동력은 독특한 운영 방식과 조직 구조

이처럼 특이하고 까다로운 과제를 다루면서도 장기간 차별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타 연구 기관들과는 다른, DARPA 고유의 독특한 운영 방안과 조직 구조가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잠재 수요에 기반한 연구 과제 선정, 실효성 있는 연구 지원

설립 목적인 임무 지향형 연구의 성공은 적합한 임무(연구 과제)의 선정을 전제로 한다. 이런 전제에 효과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DARPA는 Top-down식의 잠재적 수요 조사를 통해 연구 과제를 발굴, 선정하고 있다. 즉, 정부의 주요 부처, 기업, 각계 전문가 등 실질적인 미래 고객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미래에 중요해 질 것으로 예상되는 이슈와 문제점들을 도출하고 연구 과제의 후보군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조사된 후보안들은 다시 DARPA가 문제 해결에 동원할 수 있는 아이디어의 광범위한 탐색, 기술적인 구현 가능성 조사 등 Bottom-up식의 검토 과정을 거쳐 연구 과제로 최종 선정된다.

자체 연구 시설을 갖추지 않은 대신, DARPA는 연구 프로그램을 주도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연구 과제의 완성을 추구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정부 지원 정책이 연구 자금과 설비의 지원, 제도적 특혜 등에 그치는 것과 달리 DARPA는 연구 진행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필요한 지원 활동을 하는 것이다.

먼저 과제의 완성도를 최대화하기 위해 연구 방향 결정과 진행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 또한 과제별 연구 주체로 대학 또는 기업 중 택일하지 않고 복수의 대학들과 기업들을 동시에 참여시킴으로써 연구 진행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자연스러운 정보와 인력 교류를 촉진하고 있다. 기술 경연 대회 등의 국제적 행사를 개최해서 필요한 아이디어를 전 세계로부터 결집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연구 결과인 지적 재산권은 대학, 기업이 소유하고 사업화할 수 있도록 정부의 기존 기업 지원 제도를 DARPA 방식으로 특화시켜 적용하고 있다.

독특한 프로그램 매니저 제도

연구의 창의성과 혁신성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프로그램 매니저에게 폭 넓은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다. 연구 과정에서 정부 부처나 DARPA 등 조직 내외의 간섭에 구애 받지 않도록 프로그램 매니저가 독자적인 결정권을 보유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저명한 학자 등 외부 전문가들의 평가에 의존하는 NIH와 같은 여타 혁신 연구 기관들과 달리 DARPA는 연구 과제의 최종 선정에서부터 대학, 기업들이 참여한 프로젝트 팀 구성과 연구 진행, 관련 예산의 집행에 이르기까지 프로그램의 진행 전반에 걸쳐 프로그램 매니저가 개입,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폭넓은 권한 때문에 DARPA의 프로그램 매니저는 각 프로그램의 Virtual CEO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같은 특유의 프로그램 매니저 제도는 창의성과 혁신성을 중시하는 DARPA의 경영 철학에 기인한다. 동일한 학문을 전공한 전문가 집단은 학제적 연구의 독창성을 평가하기 힘들고, 기술적 충격(Technological Surprise)을 가져올 혁신적 연구는 문제의 핵심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전문가가 담당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는 것이다. 최근 DARPA의 공개 자료에서 언급된 “More fundamentally, surprise rarely comes from groupthink”라는 표현은 이 같은 시각을 잘 보여준다.

물론 많은 권한에 상응해서 프로그램 매니저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높은 수준이다. 연구 과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폭넓은 정보 수집과 정확한 판단을 바탕으로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문제의 해결 기회도 잘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0년대에 약 8년간 DARPA를 지휘하며 큰 족적을 남긴 전임 국장 Tony Tether는 DARPA가 원하는 인재상을 “최고의 프로그램 매니저는 자유분방하지만 목적 달성에 광적으로 열정적인 사람”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실전적 연구 인력 중심의 독립 기구로 운영

연구의 신속성과 운영의 융통성을 추구하는 DARPA의 경영 철학에 맞춰 작고 수평적인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복잡한 보고 단계로 인해 연구가 지연될 소지가 큰 관료 체제와 달리 조직의 수장인 국장(Director), 부서장(Office Director), 프로그램 매니저의 간략한 구조로 되어 있고 부서장의 주요 업무도 적합한 프로그램 매니저를 발탁하고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설립 초기부터 외부의 입김을 배제하고 자율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국방부 고위층(초기에는 장관, 이후 국방에 바로 보고하는 체계를 갖췄다. 이렇게 함으로써 DARPA는 항상 유연하고 과감한 기업형 운영을 지향하도록 보장받고 있다.

DARPA의 구성원은 총 300여 명 수준인데, 과제 진행에 전념하는 프로그램 매니저가 150여 명 내외이고 나머지는 프로그램 매니저를 위해 각 프로그램의 제반 지원 업무를 담당한다. 비록 DARPA가 국방부 소속이지만 국장, 프로그램 매니저 등 핵심 인력은 대부분 민간인이며 현역 군인 또는 군 출신은 10% 내외에 불과하다. 이들은 대학, 민간 연구소, 기업 또는 군에서 연구(Research) 경력을 갖춘 교수, 연구원, 엔지니어 출신의 석·박사 학위 소지자들이다. 상당 수는 벤처 기업을 경영한 경험도 가지고 있어 프로그램의 진행, 신기술이 적용된 제품 개발, 사업화에 대해서도 밝다. DARPA가 필요로 하는, 이론이 아닌 실증적 기술 연구와 제품 구현을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프로그램 매니저는 평균 4~6년 임기의 계약직인데, 연구 과제에 충실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 기간에는 근무의 안정성을 보장받는다. 프로그램이 종료되면 DARPA에서 경험한 혁신적 제품의 사업화 역량을 인정받아 대학, 연구소, 기업 및 군으로 복귀하기도 하고 DARPA의 연구 결과를 사업화해서 창업하기도 한다. 2012년 초, DARPA의 프로그램 매니저, 벤처 기업 창업 등 다양한 경력을 소유하고 당시 DARPA 국장으로 재직 중이던 Regina E. Dugan이 Google로 이직한 사례는 DARPA를 중심으로 한 미국 혁신 생태계의 인적 교류 문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DARPA의 독특한 조직 구성과 운영 방식은 일견 무질서하고 방만한 운영에 대한 우려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전략, 예산 등에 대한 정부 감사 기구의 엄격한 감독과 견제, 고유의 운영 방식을 고수하면서 창출해 온 차별적 성과에 힘입어 지금도 DARPA는 독립성을 갖춘 유연한 조직 구조와 자율적인 의사 결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성과를 인정한 미국 정부는 독창적인 운영 방식을 HSARPA, IARAP, ARPA-E 등 2000년대에 신설한 정부 산하 연구 기구들에 그대로 이식, 적용했다.

맺음말

DARPA는 매우 독특한 조직이다. 다른 연구 기관들과는 ‘다른’ 조직이다. 국방부 소속이면서 국방부로부터 매우 독립적이다. 정부 조직이지만 기업보다 더 기업 같은 조직이며 구성원도 민간인 출신이 90%에 이른다. 연간 $30억에 이르는 상당히 많은 예산을 운영하지만 매우 슬림한 조직이다. 매우 목표 지향적이며 결과 지향적이지만 유연한 조직이다. 매우 유연하고 혁신적인 조직이지만 50년 이상 조직의 정체성(Identity)을 거의 동일하게 유지하고 있다.

DARPA는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역할뿐 아니라 이미 개발된 기반 기술과 각 연구 기관들이 수행 중인 연구 개발 활동들을 연결하고 결합해서 새로운 혁신을 이루어 내는 일에 더 역점을 둔다. 연구 과제의 목표를 설정하고, 기반 기술들과 연구 결과들을 목표에 맞게 결합할 수도 있고 여러 기술 흐름들과 경향을 보고 새로운 연구 과제를 발굴해서 진행할 수도 있다.

DARPA의 프로그램 매니저들에게는 많은 재량권과 파워가 부여된다. 핵심 인력인 150명 가까운 프로그램 매니저들은 연구 과제를 발굴하고 진행하는, 각 연구 과제의 실질적인 리더이며 많은 관련 연구 팀과 인력들을 조합하고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집행한다. 연구를 하기도 하지만 주업무는 아니다. 그렇다고 연구 진행 과정을 평가하고 관리하는 관료적인 인력도 아니다. DARPA의 국장은 추진하던 연구 프로그램에서 DARPA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되면 프로젝트 종결을 선언한다. 그러면 더 이상 DARPA는 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DAPRA가 종료한 과제들은 기업이나 국방부 등 다른 기관으로 넘어가 본격적으로 실용화될 수도 있고 상당 기간 동안 그냥 보관되거나 폐기되기도 한다. 성공이든 실패든 과거의 결과에 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앞을 향해 달려온 결과 역설적으로 DARPA의 역할과 입지, 그리고 목표는 적지 않은 세월에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DARPA의 프로그램 매니저들은 평균 근무 기간이 4~6년 정도로 짧은 편이다. 혁신적인 결과들을 수없이 내놓은 DARPA의 핵심 인력들이 끊임없이 바뀌면서 DARPA의 연구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과 부산물들은 DARPA 밖으로 확산되어 왔고 DARPA는 늘 새로운 모습을 유지해 왔다.

DARPA가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혁신을 생산해 올 수 있었던 배경은 정교한 조직 구조나 제도적 장치, 관련 기관들의 견제와 균형과 같은 것들이 아니다. 분명한 목표, 국장과 프로그램 매니저 등 핵심 인력의 독립적인 결정권, 연구 과제를 향한 유연하면서도 강한 집념과 열정, 끊임없는 조직의 자기 혁신, 이 모든 것을 보장해 준 정부와 의회가 기반이 되었고 정부와 민간의 원활한 인력과 정보의 교류, 정부 부문의 결과물이 민간 부문으로 Spin-off되거나 서로 결과물을 공유해서 실용화하는 Diffusion방식이 모두 가능한 사회 문화적 배경도 한 몫 했다.

DARPA식의 조직이 한국에는 쉽지 않을 수 있다. 연구 인력의 규모나 예산의 가용성 등에서 차이가 날 수 있고 정부 부문과 민간 부문간 인적 교류의 유연성, 정부 재원 집행에 대한 책임과 정부 재원으로 이룬 결과의 활용 측면에서 미국보다는 많은 제약이 예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DARPA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적지 않다. 특히 Fast Follower에서 Innovator로서 거듭나야 할 이 시기에 그 의미는 더욱 클 수 있다.

DARPA와 스티브 잡스는 닮은 데가 있다. Apple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이 별로 없지만 세상에 있는 많은 기술들을 종합해서 혁신을 이루어 냈다. 스티브 잡스는 이것을 점의 연결(Connecting the Dots)로 표현했다. DARPA의 기능도 비슷하다. 수많은 점들 때로는 선들로 DARPA식으로는 Integration이라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 필요한 점이 있는데 비어있는 경우도 있고 이미 선이 꽤 그려져 있는 경우도 있다. 많은 점들과 선들을 보고 혁신적인 그림을 그리려고 애쓰는 가운데 이전에는 없었던 기막힌 그림을 그려내기도 하고 그림 그리기에 실패하기도 한다. 선들을 연결해서 거의 스케치가 끝나면 색칠하고 마무리하는 일은 다른 기관에 맡기고 새로운 점 연결로 들어간다. 이것이 DARPA이다.

DARPA식 조직이 한국에는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점을 연결하고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 한국, 혹은 한국 기업들 안에 있는 잠재력 있는 점들, 생성 가능한 점들이 별로 없다면 DARPA와 같은 조직이나 기능은 필요가 없다. 그러나 미국만큼 많지 않아도 그런 점들이 상당히 있다면, 더 이상 DARPA식 조직의 구축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든 그림을 그려내야 하는 명제가 된다. 구체적으로는 DARPA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DARPA의 역사와 성과들은 혁신 연구 생태계 내에서 DARPA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고 DARPA식의 조직 목표와 운영 방식이 성공적으로 기능해 왔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여건이 다르다는 이유로 밀쳐내기보다는 한국의 현실에 접목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볼 가치가 매우 커 보인다.[LG경제연구원 진석용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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