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북한의 화폐 개혁, 물가 잣대만으로는 평가 어렵다’
LG경제연구원 ‘북한의 화폐 개혁, 물가 잣대만으로는 평가 어렵다’
  • 유승경 연구원
  • 승인 2010.03.2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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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당국은 지난 2009년 11월 30일부터 1 주일에 걸쳐 주민들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축적한 화폐 자산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몰수형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동시에, 2002년 이후 급속하게 확대되던 사적 시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번 화폐개혁과 시장통제는 주민들이 보유한 통화량을 흡수하여 사적인 소비재시장의 인플레이션을 잡고, 시장 거래를 통제하여 국영유통망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이다. 하지만 이 조치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관련 소식통에 따르면, 이번 조치 이후 사적 시장의 인플레이션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국영유통망의 공급능력은 확대되지 않은 채 시장거래가 위축되어 주민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고 한다.

북한당국이 역량을 총동원하여 실시한 정책이 실패함으로써 북한이 급변사태에 직면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는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 조치가 국가가 개인의 부를 강제로 파괴하는 조치인데다, 이미 시장관계에 익숙해진 주민들의 경제활동을 옥죌 경우, 주민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체제 이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Ⅰ. 화폐과잉과 인플레이션의 원인

북한이 단행한 이번 화폐개혁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번 조치가 북한에서처음 시행된 예외적인 조치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화폐개혁은1992년 4차 화폐개혁 이후 17년 만에 단행된 5차 개혁인데, 4차 개혁 역시 몰수형 화폐개혁이었다. 그리고 구 소련(1947년, 1961년), 베트남(1985년) 등 ‘전형적인 사회주의체제(classical socialist system)’에서 화폐과잉과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해소하기 위해 실시한 강경정책의 한 유형이다.

북한 당국은 대외관계 단절로 인한 에너지원과 자원 공급의 부족으로 국가 부분의 생산활동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중앙계획을 통해 산업의 전략적 우선순위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체제’의 기본 틀을 유지해 왔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갖는 전형적인 문제들이 현시점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1. 사회주의체제의 전형적 특징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부족의 현상(shortage phenomenon)’과 ‘화폐과잉(monetaryoverhang)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일반적인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 부족이란 특정 상품이 전체 경제의 필요에 비해 공급량이 적은 경우뿐만 아니라, 전체 경제의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생산이 이뤄져도 경제주체들은 공급의 부족에 직면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j. 코르나이는 사회주의경제를 소비재뿐만 아니라 생산수단, 수출입 상품, 외환 등 모든 부문에서 부족의 현상이 ‘빈번하게 만성적으로’ 일어나 경제주체들의 경제행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 ‘부족의 경제(shortage economy)’라 정의했다.

부족 현상의 만연은 모든 거래에서 초과수요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계획당국이 가격을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억압되지만 그 압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자원이 국방 등 중공업 분야로 우선적으로 배분되기 때문에 소비재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가계에는 사용하지 못한 화폐가 쌓인다. 이 잉여 화폐는 강제된 저축(forced savings)이 되거나, 농민시장이나 암시장에서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

한편, 사회주의체제에는 국가가 재정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발행한 화폐가 가계로 지속적으로 누출되는 화폐과잉의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 과잉 공급된 화폐는 소비재 시장의 인플레이션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부족 현상의 원인으로서의 판매보장

사회주의에서 국가는 중앙계획에 따라 국유기업에 생산지표를 하달하며, 생산지표에 따라 생산된 제품을 모두 구매한다. 부족현상과 화폐과잉은 이처럼 국가가 ‘기업 생산물의 판매를 보장’하는 체제의 본질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먼저 ‘판매의 보장’이 부족의 현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계획당국은 국가계획에 따라 생산된 제품을 모두 구매한다. 국가가 가격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윤은 개별기업의 경영활동이 아니라 국가의 가격정책에 의해 결정된다. 생산부문간이윤율의 차이가 발생해도 국유기업의 경제활동은 국가계획을 따라야 하므로 높은 이윤이 보장되는 부문으로 진입할 수 없다. 이로써 이윤은 자본의 흐름을 인도하는 기능을 상실한다. 그리고 생산물의 판매가 보장되는 상황에서 국유기업의 이윤극대화는 생산지표의 달성을 통해 이뤄진다.

생산지표 달성이 경영의 목적이 되면, 기업의 투입요소에 대한 수요는 무한정 증가하며, 투입요소의 공급은 늘 수요에 비해 부족하게 된다. 공급부족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면 계획당국은 해당 품목의 생산 능력이 낮다고 판단하고 투자수요를 증가시킨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경제영역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부족현상은 사회주의의 고유한 특징이 된다.

화폐 과잉의 원인으로서의 판매보장

화폐과잉도 국가에 의한 기업 생산물의 판매 보장에서 기인한다. 사회주의에서 국가는 기업 생산물의 판매자인 동시에 구매자이다. 그러나 국가가 구매한 생산품들의 구성과 질과 양은 ‘실질적인 수요’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 ‘국가가 이미 기업에 대금을 지불하고 구매한 제품 중에서 다른 기업이나 국영상점이 구매를 하지 않는 상품’이 존재하게 된다. 국가가 구매한 생산물 중 경제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생산물은 그것에 지불된 금액에 해당하는 만큼 재정 적자를 발생시킨다. 현실 사회주의가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렸던 원인은 여기에 있다.

계획당국은 통화발행을 통해 재정적자를 보전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경우,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진행되기 전까지, ‘화폐의 구매력이 안정적으로 증가하며, 인플레이션은 사회주의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도그마가 지배적이었고, 이 도그마는 재정 적자를 중앙은행의 화폐발행과 주민들의 저축예금을 통해 보전하는 정책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산업부문별 성장속도의 불균형, 계획당국과 기업 간의 정보 왜곡과 단절 등은 경제가 복잡해질수록 심화되어 재정적자는 늘어나고 통화발행은 지속된다. 그리고 과다하게 발행된 통화는 결국 여러 경로를 통해 가계로 흘러가서 소비재 시장에서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

2. 북한에서의 부족 현상과 화폐과잉

1998년 공식적으로 출범한 김정일 체제는 2002년 새로운 경제노선으로 ‘선군(先軍)시대의 경제건설노선’을 제시했다. 이 노선의 기본 내용은 ‘군수생산지표 달성을 위해 우선적으로 자원을 보장해주고, 나머지 자원으로 민수생산지표의 수요를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이 방침을 김정일이 새롭게 제시한 ‘배제를 통한 선택과 집중’전략이라 평가하는 이도 있지만, 이것은 ‘국가전략에 의해 결정된 우선순위에 따라 자원을 계획적으로 배분하는 사회주의체제’의 기본 성격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북한이 중앙에 의한 ‘계획의 일원화와 세부화’를 공식적인 방침으로 삼았던 시기에도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고, 전략적인 우선 부문에 대해서는 자원배분을 엄격히 관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같은 우선순위에 따른 자원배분체계는 중국이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1964년 제3세계 국가 중 처음으로 핵개발에 성공하고, 북한이 고난의 행군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핵개발을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한편, 북한은 2002년 7·1 조치로 기업소의 경영지표로서 ‘번수입지표’(벌어들인 수입: 이윤+임금)를 도입했다. 이 지표의 도입으로 기업의 목표가 ‘생산량 극대화’가 아닌 ‘이윤 극대화’로 전환되었다는 과장된 평가를 내리기도 하는데, 번수입지표의 도입은 현물지표, 총생산액지표 등 기존 지표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생산비절감을 유도할 수 있는 지표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북한 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현물지표가 달성되었을 때에는 번수입계획수행률을 그대로 인정하지만, 현물지표가 달성되지 못하면 번수입계획수행률에서 범칙금을 뺀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현물의 생산량 지표는 기업활동을 감독하는 데 있어서 핵심지표이다.

따라서 북한 경제체제는 ‘국유기업의 생산물에 대한 판매보장’이라는 사회주의체제의 본질적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부족 현상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기업소의 과도한 자재비축 현상(기관본위주의)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이 심각한 재정적자를 겪고 있다는 점은 국정가격 보전금의 폐지와 같은 사례를 통해 확인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과도한 통화 공급이 이번 화폐개혁의 원인을 제공했다.

Ⅱ. 화폐과잉과 인플레이션의 조절방식

북한은 여타 사회주의체제와 마찬가지로 화폐과잉과 인플레이션을 제어하기 위한 제도적, 정책적 수단을 동원한다. 그러나 근본 원인이 ‘국가에 의한 기업 생산물의 판매 보장’에 있는 만큼, 그 방안은 효과가 제한적이며 일시적이다.

1. 화폐유통의 이원화

북한의 공식적인 경제운영원리에 따르면 화폐유통체계는 서로 엄격히 분리된 ‘현금유통’과 ‘무현금유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금유통은 중앙은행에서 월급의 형태로 주민들에게 공급된 현금의 유통체계이며, 무현금유통은 기관·기업소들이 원부자재와 기계 등을 거래할 때 계좌이체를 통해 대금결제가 이뤄지는 자금의 순환을 말한다.

화폐유통의 이원화는 사회주의국가의 공통된 정책인데, 계획당국은 실물의 흐름과 정확히 역의 방향으로 순환하는 무현금유통을 통해 전체 경제의 활동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통제 방식을 북한에서는 ‘원에 의한 통제’, 소련에서 ‘루블에 의한 통제’라 일컫는다.

계획당국이 두 화폐유통체계를 단절하려는 이유는 국가재정에서 국유기업의 투자자금 등으로 지출된 ‘무현금 화폐(scriptural money)’가 ‘현금화폐(fiduciary money)’로 전환되어 가계부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화폐 유통 이원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

현실 사회주의경제에서 두 유통체계는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다. 기관·기업소는 중앙은행으로부터 무현금화폐로 자금을 할당 받는다. 만약 기업소가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사적인 소비재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면 무현금통화를 통해 현금통화를 발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주민들이 국영 상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면 현금화폐가 국가로 환수되어 무현금화폐로 전환된다. 그리고 기관·기업소는 중앙은행에 하나의 구좌를 가지고 있으므로 구좌에 기입된 금액이 다른 기관·기업소에서 이체된 무현금인지, 주민들로부터 흡수한 현금인지는 구별되지 않는다.

만약 기업이 중앙은행에 무현금 화폐를 다른 명목으로 할당 받아, 가계로부터 노동력이나 원자재를 구입하게 된다면 무현금화폐는 현금화폐로 전환된다. 현실 사회주의에서 국유기업들은 투자재의 부족에 자주 직면하기 때문에 생산지표의 달성을 위해 자본을 노동으로 대체하여 생산하는 경우가 잦다. 이 경우 투자재 구입을 위해할당 받은 무현금 화폐는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불하기 위한 현금화폐로 전환되어 가계의 수입이 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두 화폐유통체계를 차단하고 있던 장벽은 허물어지고 국가재정이 기업소에 제공한 무현금형태의 자금은 현금으로 전환되어 사적 시장에서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

북한의 경우, 7·1 조치를 통해 기업소가 원자재를 사적 소비재시장에서 조달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조치는 관행적으로 행해지던 활동을 합법화한 것이지만, 당국스스로 화폐유통의 이원화 원칙을 후퇴시킨 것으로 이 조치는 7·1 조치 이후 사적시장에서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킨 하나의 원인을 제공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국유기업들 간의 거래도 사회주의 운영원리와는 달리 현금거래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중앙계획경제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중앙이 모든 경제단위의 상호·복합적인 거래과정을 단일의 계획안에 최적으로 짜 맞추어 이 계획에 따라 기업소간의 자재공급이 정확히 이뤄져야 한다. 북한은 ‘계획의 일원화와 세부화’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자재공급의 난맥상은 전시기에 걸쳐 일상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국유기업의 주된 경제활동은 세부계획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재공급의 불확실성에 예비적으로 그리고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국유기업들은 계획에 의해 보장된 자재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할 경우 스스로 자재를 확보해야 한다. 자재를 확보하는 방법으로는 필요물자를 공장끼리 물물교환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기업소간의 뒷거래는 현금을 매개로 한 준시장적인 거래로 발전했다. 2001년 10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국가의 중재 하에 기업 간 필요자재를 물물교환하는 ‘사회주의 물자교류시장’을 도입했지만 현금거래는 오히려 확대되었고, 마침내 북한당국은 7·1 조치를 통해 기업소간 생산재 거래에서 현금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제까지 ‘원에 의한 통제의 강화’라는 방침에 따라 금지했던 기업 간 현금거래가합법화된 것은 기업의 자율성을 높인다는 면에서 전향적 조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동안 국정 가격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생산재 시장에서의 인플레이션을 현실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2. 부분적인 사적 경제영역의 허용

보완적 관계로서의 국가부문과 사적 부문

북한을 포함한 모든 사회주의에서 사적 경제부문(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은 화폐과잉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완화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사적 부문은 주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화폐가 늘어나는 데 맞춰 탄력적으로 공급을 증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경제영역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암시장은 1980년대부터 늘어나기 시작했고, 1990년대 들어서는 경제위기로 인해 국가경제부문이 무력해지면서 급속히 확대되었다. 이 현상에 주목하여 북한은 계획경제에서 계획과 시장이 공존하는 체제로 전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 역사 속에 존재한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국가 영역/사적 영역의 이중구조였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는 초기단계에 농업을 집단화하였지만, 농민과의 정치적 타협의 하나로서 농민들이 자유경작을 할 수 있는 텃밭을 허용하였고, 텃밭의 산물을 거래할 수 있는 농민 시장’(kolkhoz market)을 합법적으로 보장했다. 북한도 이 부분에서 예외는 아니다. 정권 초기부터 합법성을 인정받은 농민시장은 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부침을 겪었지만 단절 없이 사적 생산물의 시장으로 기능해 왔다.

또한 구 소련의 경우,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이뤄지던 시기에도 비합법적인 암시장과 불법적 생산 단위는 존재했다. 북한의 경우에도 ‘개인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되었다고 선언한 1958년 이후에도 2차 경제라 불리는 사적 영역은 존재해왔다.

현실 사회주의에서 ‘사적 경제영역’이 사라진 국가나 시기는 없었으며, 오히려 국가 부문과 사적 부문은 상호보완적 관계 속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재생산을 뒷받침하는 두 축으로 기능했다.

북한 당국은 경제가 침체로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사적 경제영역을 점차적으로 양성화해 왔다. 2003년에는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명칭을 바꾸고 공업제품의 유통까지 보장하는 파격적인 개혁 조치를 취했다.

갈등적 관계로서의 국가 부문과 사적 부문

그러나 국가 부문과 사적 부문 사이에는 갈등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 간부나 행정의 책임자들은 사적 영역의 확대를 통제능력의 약화로 인식하며, 특히 중앙권력이 체제 안정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면 사적 영역에 대한 통제는 강화된다.

북한 당국도 7·1조치 직후인 2002년 7월 농민시장을 일시적으로 폐쇄하고 사적 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며, 2005년부터 시장 억제책이 점차 강화되었고 2008년 말에는 2009년부터 종합시장을 농민시장으로 다시 되돌린다는 정책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말, 화폐개혁 조치와 함께 종합시장을 폐쇄하고 개인영리기업을 몰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모든 사회주의에서 집권세력들은 사적 부문에 대해 통제와 완화를 주기적으로 반복해왔다. 북한이 취한 2009년 말의 조치도 2003년 이후 사적 경제의 양성화 정책이 중앙권력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는 집권층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3. 국정가격의 현실화

국정가격을 농민시장 수준으로 현실화하는 것도 과잉화폐를 흡수하는 한 방식이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실시된 배급제가 아직 폐지되지 않았던 1944년, 배급대상 외의 소비재를 시장가격에 준하는 가격으로 판매하는 국영영리상점을 개설했다. 이 영리상점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과잉화폐를 흡수하여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했을 뿐만 아니라 국정가격과 시장가격의 차이를 줄여 국영유통망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정책의 성공은 제2차 대전의 종식으로 소련의 소비재 공급능력이 향상되었던 데 힘입었다.

북한은 2002년 7·1조치를 통해 전품목에 대한 국정가격을 평균 25배 인상하여 농민시장 가격수준에 접근하게 만들었다. 이 조치는 ‘사회적 공짜’를 없앤다는 명분하에 국정가격 보전금을 폐지하여 재정부담을 감소시키고, 국정가격과 시장가격과의 차이를 줄여 국영유통망을 강화하는 한편 과잉화폐를 흡수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국영상점은 공급능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 이후 종합시장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종합시장의 공급능력도 단기간에 큰 폭으로 향상될 수 없는데다, 7·1 조치 이후 화폐유통에 대한통제가 완화되면서 시장으로 과도하게 많은 화폐가 유입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Ⅲ. 화폐 과잉에 대한 강제적 흡수방식 : 몰수형 화폐개혁

화폐순환의 이원화, 사적 경제의 양성화, 국정가격의 현실화 등의 조절방식들은 화폐과잉 현상을 완화시킬 수는 있지만, 앞서 보았듯이, 경제체제의 고유한 특성에서 기인하는 화폐과잉 현상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7·1 조치 이후 북한의 종합시장의 상황처럼 과도하게 발행된 화폐가 사적 시장을 하이퍼 인플레이션 상황으로 몰아넣으면 정책당국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사적 영역을 통제하고, 화폐 유통의 공간을 축소한다. 지난 2009년 말에 북한 당국이 단행한 몰수형 화폐개혁과 시장통제 조치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같은 정책은 북한에서1992년에 실시된 적이 있고, 소련의 1947년과 1961년 화폐개혁, 그리고 베트남의1985년 화폐개혁도 동일한 성격의 조치였다.

북한의 2009년 개혁을 과거 사례와 타국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몰수형 화폐개혁의 내용과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교환한도의 제한 : 유동성 억제와 정치적 선전효과

화폐개혁의 최우선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은 주민 보유 현금의 교환기간과 교환한도의 설정이다. 교환기간을 짧게 설정하여 회피수단을 마련할 여유를 주지 않고, 교환 한도 내에서만 신권으로 교환해줌으로써 주민들의 유동성을 대폭적으로 줄여 인플레이션 압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한도액을 설정하지 않아도 동일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소련은 1961년 개혁에서 현금의 교환한도를 정하지 않았지만, 화폐 수입의 출처를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은 교환을 포기했다. 교환한도를 설정한 경우에도 출처를 밝힐 수 없는 사람들은 한도 내의 금액도 교환을 포기할 것이다. 화폐개혁은 투기세력의 근절이라는 정치적 선전과 함께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번 북한의 화폐개혁은 사적 경제영역에서 대량의 화폐를 축적하여 경제적 영향력을 높인 비공식적인 상인계층, 혹은 지하경제 종사자들에 가장 큰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2. 교환비율 차등화 : 자산의 재분배 효과

북한의 1992년 개혁은 현금의 교환방식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구권 399원까지는 1대1의 교환비율로 신권으로 교환해주었고, 30,000원 이상은 무효화한 반면, 400원-30,000원까지는 1대1의 같은 교환비율을 적용했으나 신권을 강제로 은행에 예치시키고 일정기간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1947년 소련개혁에서는 예금에 대해서는 현금보다 훨씬 유리한 교환비율을 적용했지만, 예금액수가 클수록 불리하도록 교환비율을 차등화 했다. 예금에 대한 우대 비율은 현금보다 소비재가격에 영향을 덜 미치는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1947년 개혁에서 협동농장이 보유하고 있던 현금에 대해서는 개인보다 8배나 유리한 교환비율을 적용했다. 관련 문헌에서는 협동농장의 현금은 소비재만이 아니라 생산재 구입에도 사용되기 때문에 소비재의 물가상승을 자극할 여지가 적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화폐보유주체에 따라 교환비율을 달리한 것은 자산을 재분배하는 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북한이 최근 실시한 화폐개혁의 효과를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협동농장과 기업소가 보유한 현금과 그들의 자산/부채 등의 교환비율은 어떻게 정해졌는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3. 추가적인 임금 및 가격 조정 : 국가부문 강화

개혁 이후 임금과 가격체계의 변화가 뒤따르기도 한다. 북한의 지난해 개혁에서는 현금 교환비율이 100대 1이었지만, 국가부문 노동자의 임금은 신권으로 종전 금액을 인정해줌으로써 사실상 임금을 100배 인상했다. 최근 러시아 출신의 학자는 북한의 이 조치는 다른 사회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지적했지만, 소련도 1947년 현금은 10대1로 교환해주었지만 임금은 그대로 유지하여 결과적으로 임금을 10배 인상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화폐개혁을 통해 비국가 부문 종사자의 구매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국가부문 종사자들의 임금을 향상시킴으로써 국가 부문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Ⅳ. 북한, 강화된 통제력으로 대외관계 활로 모색할 듯

북한의 화폐 개혁은 과잉화폐를 흡수하여 시장 가격을 안정화시킨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실패했다. 사회주의 경제에서 사적 시장의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상품의 국정가격과 시장가격이 크게 괴리되면 상품이 국영상점으로 공급되지 않고 시장으로 몰리게 되어 국가의 공식적인 상업망이 무력화되기 때문이다.

화폐개혁 이후 일반 주민들의 구매력은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가격이 폭등한 것은 상품 공급이 크게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우선 북한 당국의통제로 인해 이제까지 불법이나 편법으로 국가부문에서 종합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던 상품들의 양이 크게 줄었을 것이며, 주민들도 자체적으로 생산한 물품을 예전같이 선뜻 시장에 내놓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공식적인 상인계층들이 자금력 저하와 활동의 제약으로 인해 상품 유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것도 중요한원인일 것이다. 수요측면을 살펴보면 일반 주민들은 구매력이 약화되었지만,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은 100배나 인상되어 시장 전체의 수요는 공급만큼 크게 위축되지 않아 물가폭등의 또 다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보면, 화폐개혁 이후 시장가격의 폭등이 일반 주민의 생계에 어려움을 가중시켰지만, 국가 상업망은 당국이 행정적, 정치적 수단을 통해 상품들의 불법적 유출을 줄여 어느 정도 기능을 회복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가폭등만으로 화폐개혁이 실패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화폐개혁은 인플레이션 억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적 영역의 부를 국가부문으로 이전시켜 국가부분을 강화하고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다.

이 점에서 북한당국은 일정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몰수형 화폐개혁의 가장 큰 난제는 주민들의 저항이다. 주민들은 당황하고 혼란상을 보이고 있지만 조직적으로 당국의 조치에 저항하려는 징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년간의 경제위기 과정에서도 북한 주민들은 탈북과 같은 소극적 저항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장기적으로는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체제이반의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주민들은 북한당국의 조치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물론, 북한 당국도 국가부분의 강화를 통해 경제를 회생시킬 수 없으며, 이미 주민들은 시장활동에 익숙해진지라 현재의 통제조치를 장기간 유지하기 힘들다는 점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한은 이번 조치로 일시적이나마 강화된 경제와 주민에 대한 통제력을 기반으로 단기간에 북한경제에 숨통을 틔게 해줄 수 있는 대외관계에서 활로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북한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그리고 핵 문제 등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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