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후 무정부 상태를 벗어나 환란 상황을 극복하고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이 제정되는 등 본격적인 경제재건을 위해 기반이 마련되어 갔다.
마침내 1950년 3월에 ‘경제안정15원칙’을 중심으로 한 정부의 경제안정정책이 점차 효력이 발생하는 등 독립국가로서 변모를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기틀이 형성도 하기 전에 6.25 동란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앞서 정부는 일제 강점기의 식민주의적 금융체제에서 자주적 금융체제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1950년 6월12일 한국은행을 창립했다.
그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창립을 위한 산고의 고통도 사라지기전에 동란을 맞아, 한국은행은 전시체제로 전환했다.
전쟁이 발발한지 3일만인 1950년 6월28일 정부의 남하와 함께 한국은행 본점도 대전으로 이동했다.
본점 이동과 함께 보관하고 있는 금과 현찰 등을 긴급히 소개했으며 그 뒤 전선이 남쪽으로 이동됨에 따라 본점도 대구로 옮겼다가 다시 부산으로 이전하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정부는 6.25 동란이 일어나자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사변수급비상경비예산’을 편성하여 1950년 10월까지 월별로 집행했는데 그 뒤 세입원의 상실과 재정지출의 급격한 팽창으로 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금은 거의 전액을 한국은행으로부터 차입에 의존하게 됐다.
78년도에 발행한 한국금융 30년사에 따르면, 그 바탕위에 한미간에 ‘UN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한국은행이 UN군에 대한 대여금 형식으로 UN군의 전비까지 조달하게 되자 통화팽창에 의한 인플레이션이 불가피 했다.
한편, 우리나라는 동란기간중 ECA원조자금, UN원조자금, FOA 및 GRIK, UNKRA 원조자금 등 470만불에 달하는 막대한 원조를 받아 전쟁복구에 큰 도움을 받았는데 이 일을 한국은행이 수행했다.
전시중에도 대구에서 처음으로 천원권과 백원권 두종류의 한국은행권을 발행했다. 당시 통용중이던 조선은행권과 함께 사용하게 된다.
이 와중에 공산집단들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북한 인민권 유통은 물론 발행되지 않은 조선은행권을 불법발행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정부는 1950년 8월28일 대통령긴급명령 제10호로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한국은행은 이법에 의거하여 그해 9월15일부터 51년 4월30일까지 5차례에 걸쳐 문제가 된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하에서 1953년 휴전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UNKRA 부흥계획의 추진 등 경제안정의 징후가 뚜렸해짐에 따라 그해 2월15일 대통령긴급명령 제13호로 ‘제1차 긴급통화 및 금융조치’를 단행하여 화폐단위를 100분의 1로 절하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을 보면, 먼저 2월17일부터 구원화표시 한국은행권의 유통을 일체 금지하는 대신에 새로 발행되는 원화표시 은행권을 법화로 운용토록하고 구원화와 원화간의 교환비율은 100:1로 한다.
다음으로 2월17일부터 9일간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예금 등 인출을 금지한다.
마지막으로 구은행권과 지급표시 및 예금에 대하여는 1인당 500원씩의 새 은행권을 교부하고 나머지는 동결한다.[파이낸셜신문=임권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