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인재전쟁 시대, 여성인력이 대안이 되려면’
LG경제연구원 ‘인재전쟁 시대, 여성인력이 대안이 되려면’
  • 정지혜 책임연구원
  • 승인 2011.10.2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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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실업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많은 기업들이 지식 사회로의 이전, 기술 혁신으로 생긴 새로운 일자리를 채워줄 고급 인재들의 부족을 호소한다. 인력 시장의 ‘거대한 부조화’ 속에서 여성 인력이 또 한번 구원투수로서의 가능성을 주목 받고 있다.

다양성과 창의성이 중시되는 앞으로의 경영 환경에서 조화와 관계를 중시하는 여성 특유의 장점은 더욱 빛을 발할 것으로 기대된다. 강력한 구매의사결정자로 부상한 여성 소비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조직 내 여성의 시각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미 학교에서는 남성보다 더 우월한 학업 성취도와 리더십을 보이는 잠재적 여성 인재들, ‘알파걸’이 주목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출산, 육아로 많은 여성들이 경력 단절을 경험하고 있으며 특히 고학력 여성들은 경력 이탈 후 복귀가 어려운 상황이다. 취약한 보육 시스템과 시간 활용 측면에서 경직된 업무구조, 여성 인력에 대한 편견이 개선되지 않는 한, 알파걸들의 활약은 현실화되기 어렵다.

여성들 특유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한시적인 경력 단절이 있어도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경력의 유연성’을 보장해야 한다. 개개인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스마트워크도 여성들의 경력 단절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모성보호제’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부과하는 제도들은 근래의 달라지는 가치관을 반영해 모든 근로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또 강제적인 여성할당제보다는 기업이 적극적인 스폰서가 되어 여성 인재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제도적, 문화적 장벽을 없애며 중간관리자부터 차근차근 육성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미래 인재전쟁 시대, 이제 남성과 여성의 서로 다른 라이프사이클과 가치, 성향 차이를 이해하고 양쪽 모두의 역량을 활용할 수 있는 양성 언어 구사력(Gender Bilingual)이 필요하다.

반 세기 동안 여성은 역사상 유례없는 사회·경제적 지위 격상을 경험했다. 미국의 경우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37%에서 지난해 48%까지 높아졌다. 산업별로는 금융 서비스, 전문 서비스, 관광, 미디어, 헬스케어 분야 등 앞으로 더욱 성장이 예상되는 분야에서 활약이 두드려진다. 전 세계 가구의 20%는 여성들이 벌이를 전담한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 Booz & Company는 2014년이면 여성 인력이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가 중국과 인도 GDP 합의 2배 이상인 18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의 눈부신 성장은 여성 인권운동의 결실이라기보다 경제적 필요에 따른 결과다. 2차 세계대전 때 전쟁터로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 일터로 뛰어든 여성들 중 일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남아 일을 했다. 이들은 농경사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유급 맞벌이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며 이후 산업화 시대의 성장을 함께했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는 1970년대 미국 GDP 성장의 65%가 여성과 베이비부머의 노동시장 유입에 따른 인력 확대 덕분이라고 추산했다.

1. 인재 전쟁시대의 구원투수, 여성 인력

이처럼 스스로의 경제적 위상을 높이며 사회 발전에 기여해 온 여성들은 미래 인재 전쟁 시대에 또 한번 구원투수로서의 가능성을 주목 받고 있다. 2010년 세계 경제 포럼에서는 미래 인재 부족을 중요한 화두로 제시했다. 전반적인 실업률은 여전히 높은 가운데 숙련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은 부족해 치열한 인재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 BCG가 13개 산업 10개 직업군을 대상으로 인력 수급 상황을 모의실험 한 결과, 한국도 인재 부족 국가군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채용정보업체 맨파워그룹이 전 세계 4만여 명의 고용주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경기와 상관없이 30-40% 기업들은 인재 부족을 호소해 왔으며 최근 더욱 증가하고 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거대한 부조화’라 부르며 “노동시장이 구조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자리의 신흥국 이전, 업무 자동화 등으로 잉여인력이 늘어난 반면, 기술 혁신으로 새로 생긴 일자리에 충원할 인재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래 인재 부족에 대한 여러 대안 중 하나는 바로 여성 인력이다.

여성들의 잠재력

일단 잠재력 측면에서 여성들은 고부가 인력이 되기 충분하다. 여성은 2010년 미국 4년제 대학 졸업생의 58%를 차지했으며 다른 OECD 국가들에서도 여성 졸업생은 평균적으로 전체 대학 졸업생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하버드대학 댄 킨들러교수는 미국 여학생의 20%가 학업 성취도뿐 아니라 운동, 친구관계, 미래에 대한 비전과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학생을 능가하는 엘리트 소녀 집단인 알파걸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대학진학률이 최근 남성을 추월했으며 외무고시 합격자의 절반 이상, 행정고시 합격자의 절반, 사법시험 합격자의 40% 이상이 여성이다.

더욱이 경제의 소프트화가 진행될수록 여성이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공간은 넓어진다. 미국 경제전략 보고서 해밀턴 프로젝트는 70년대 말과 2000년대 말 사이 진행된 미국 노동시장의 주요 직종별 고용 양극화 현상을 다뤘다. 단순 노무의 저급 일자리와 관리, 전문직, 기술직 등의 고급 일자리는 증가한 반면, 단순 사무직, 영업, 생산 등 중급 일자리는 감소했다는 것이다. 이는 동 시기에 미국 경제가 고부가 지식 서비스 분야로 급격한 산업 구조조정을 겪었기 때문인데 독일, 영국 등 여타 선진국 경제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관찰된다. 주목할만한 것은 여성 인력의 경우 고급 일자리에서의 인력 증가가 훨씬 높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기대되는 우리의 산업구조 변화와도 맥을 같이하며 여성들의 활약을 기대하게 한다.

특히 창의성과 협동을 요구하는 미래의 지식 경제에서는 여성의 장점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많은 연구들은 조직의 다양성 확대가 긍정적 경영 성과를 만든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최진남 교수가 국내 대기업 직원 3,000명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팀의 성별 다양성이 연령 다양성이나 직급 다양성보다 구성원의 창의성에 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리더십 측면에서도 위기 이후, 공격적이고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남성들의 성장 방식에 반하여 조화와 관계를 중시하는 여성적 리더십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맥킨지가 선정한 성공하는 리더들이 갖추어야 할 9가지의 덕목 중 5가지는 여성들에게서 더 높게 나타났다. Fortune 500기업 가운데 여성 임원 비중이 높은 기업들이 다양한 산업 분야에 걸쳐 좋은 성과를 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소비자로서의 여성의 권한이 높아진 것도 여성 인재를 예의주시해야 할 중요한 근거다. 유럽의 경우 여성들은 전체 구매 결정의 70% 이상을 결정한다. 일본에서도 신 차 구매의 60%는 여성들에 달려있다. 여성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사업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결국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하듯 남녀 양쪽의 개성과 장점을 잘 활용할 수 있는 ‘Gender Bilingual’이 기업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월마트가 여성이 이끄는 공급업체들을 육성하고 IBM이 이공계 여성 인력 양성을 위한 과학캠프를 운영하는 것도 점차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는 경영 환경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나름의 생존 전략인 셈이다.

2. 우리나라 여성 노동력 활용의 불편한 현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여성 인력 활용 가능성은 어떨까? 경쟁력 있는 잠재 인력들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그만큼 발전할 여지가 많다’는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 나라는 가능성 측면에서 최상위권이다. 세계경제포럼이 매해 발표하는 성 격차 지수(Gender Gap Index)에서 2010년 우리 나라는 134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104위를 차지했다. 경제 참여 기회, 교육, 건강과 생존, 정치적 권한 등을 척도로 한 평가 지표에서 특히 ‘경제 참여와 기회’가 매우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현재 서울소재 대학 신입생 중 여학생 비중은 2010년 기준 54%로 이미 남학생들을 앞질렀다. 여학생들의 높은 학업 성취도 때문에 아들 가진 부모들이 남녀공학을 기피할 정도라는 알파걸들의 활약상은 아직 학교 밖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우선 전반적인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여전히 낮다. OECD 국가 평균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64%이고 상위 국가의 경우 80%를 육박하는데 우리나라는 2010년 기준 58.4%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2000대 중반 이후 증가 속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여성 고용자 수는 90년대 남성의 69%에서 2000년 71%로 높아진 이후 지난 10년간 더 이상 변화가 없다. 대기업일수록 여성 고용에 대해서는 더욱 인색하다. 국내 취업정보업체 인크루트가 350개 상장기업 현황을 분석한 결과, 여성 취업률은 2005년 28.3% 이후 꾸준히 감소해 2008년에는 20.1%까지 떨어졌다. 또 여성 근로자의 70% 이상이 30인 미만 영세 사업장에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우리나의 여성 인력 활용은 양적으로도 선진국 대비 미흡한데다 확대 속도도 둔화되고 있으며 뚜렷한 질적 차이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활발한 시기에 활동이 꺾이는 M자형 흐름도 여전하다. 2010년 여성의 연령별 경제활동참가율은 25∼29세 때 69.8%로 가장 높고 육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30∼39세에는 50%대로 떨어졌다가 40대가 되어서야 회복된다. 30대 여성들의 경력단절 구조는 OECD 국가들 가운데 우리 나라와 일본에서만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더욱이 대졸 이상의 고학력 여성들은 출산, 육아 시기에 경력을 이탈한 이후 영영 복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L자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는 경력 단절 후 재취업이 가능한 일자리가 주로 비정규직, 단순노동 등에 집중되어 있어 실질적으로 고학력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가 많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현상은 고급 인재 확보를 위해 여성 인력 활용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문제 상황에서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낮은 경제활동참가율 이면도 주시해야 한다. 계속 일을 하고 있는 여성, 일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여성 중에서도 제도와 편견으로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인재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하는 여성들이 치러야 할 높은 기회비용

사실 우리나라 보육 시스템 현실이나 경직된 업무 구조, 여성 인력에 대한 인식 등을 생각하면 이러한 현상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정책 시뮬레이션 가운데 우리 나라는 보육지원을 강화했을 경우의 개선효과가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예상되었다. 반대로 해석하면 보육 시스템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얘기다. 2010년 우리 나라보육지원예산은 GDP 대비 0.5%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방과후 자녀들을 공립 보육원에 맡기는 비율도 3% 이하로 북유럽의 70% 수준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여성가족부가 발행한 경력단절여성 재취업 실태조사(2009)를 살펴보면 경력 단절을 경험한 여성들의 60% 이상은 육아나 보육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일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더해 세계적으로 긴 노동 시간과 유연 근무제의 도입 비중이 낮은 경직된 업무 환경도 여러 가지 역할을 요구 받는 여성들에게는 불리한 조건이다. 최근 검찰총장이 대학생들 대상 강연에서 “남자 검사는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집안일을 포기하고 일하는데, 여자 검사는 애가 아프다고 하면 일을 포기하고 애를 보러 간다”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 발언은 일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요구수준과 그 안에서 여성들이 겪는 다양한 책임들간의 충돌, 그리고 일터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많은 여성들이 성장 비전을 갖고 동기부여를 하기란 어렵다. 맥킨지 조사에 따르면 승진심사 시 주요 판단 기준도 남녀가 차이가 있다. 남성들은 잠재력에 따라 결정되는 반면, 여성들은 과거의 성과에 따라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자체도 여성들에게는 불리한 이중잣대지만 더 심각한 것은 가장 생산성을 발휘할 시기의 경력 단절이 해당 기간을 넘어서 전체 커리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쉽다는 것이다. 상위 직급으로 올라갈수록 여성 비율이 급감하는 것을 여성들의 근성이나 리더십 부족 탓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불편한 진실이든 바로잡아야 할 편견이든 이러한 인식이 존재하는 한, 여성들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라는 숫자가 전보다 증가했더라도 일하는 여성들이 갖는 고민의 내용은 2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러모로 여성들은 계속 일을 하는 데 따른 기회비용이 높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여성들에게 일과 가정은 조화가 아닌 선택의 문제다. 이대로라면 여성들의 높은 대학진학률이나 알파걸의 부상만으로 여성 인재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렵다. 10년쯤 지나 <그 많던 알파걸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라는 제목의 기획 기사를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여성이 인재 경쟁력 확보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3. 실효성 있는 제도를 위한 고민

여성 인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차적 과제로 보육 시스템의 개선이 시급함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여성들을 위한 제도가 있어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문제도 매우 심각하다. 2010년 여성가족부 설문조사에 따르면 현재 육아휴직을 선택한 여성은 전체 취업여성의 2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승진이나 인사상의 불이익,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 하는 인식의 문제가 주요한 원인이다. 그래서 흔히 여성 노동의 문제는 시스템과 제도 개선뿐 아니라 인식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업과 고용주가 여성인력 유지를 위한 제도와 투자 효과에 동의해야 하고 육아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가족과 사회 공동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생산성과 근로 시간에 대한 생각도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인식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전에 기업이 먼저 제도적으로 바꾸어 나갈 부분은 없을까? 때로는 제도를 통해 인식 변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이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구성원들의 맞춤화된 경력 관리, 일하는 방식의 변화와 새로운 가족 문화 수용에서 어쩌면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뿐 아니라 ‘경력 관리’의 유연성을 높여야

우리 나라의 경직된 업무 구조는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큰 장애요소다. 육아기 단축시간 근무제, 장기 육아휴직 제도 등이 있지만 도입 비율도 낮고 있어도 활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직무 유지가 어렵고 직간접적 불이익이 두려워 여성들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나라는 파트타임 근무가 비정규직 문제와 맞물려 고용의 질과 관련되기 때문에 효과에 한계가 있다.

사실 유연근무제의 성공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적어도 육아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유연근무를 택하게 될 경우, 집중 육아 기간 중에 업무의 축소나 공백을 가졌다가도 원래대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즉 시간의 유연성뿐 아니라 경력의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성 고용 규모를 유지시키는 대안은 될 수 있지만 인재 육성의 대안으로는 한계가 있다. 골드만삭스가 후원하는 여성인력관련 특별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커리어 기간 중 일정 시점에서 잠시 하차(off ramps)를 결정하지만, 그 중 절대 다수(93%)가 다시 복귀(on ramps)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여성들에게 그럴 기회가 있느냐이다. 이 연구는 여성 인재 관리의 성공을 위해서는 경력 출구차로와 진입차로(off ramps and on ramps)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연한 경력 관리 기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년 전, 미국에서는 펠리스 슈바르츠라는 미국 여성운동가가 제안한 ‘마미 트랙(mommy track)’이라는 여성 경력 관리 방안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기업은 아이를 원하는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지출을 해야 하므로 아이 없이 직장만을 지향하는 여성과 남성에게 승진의 기회를 주고 아이가 있는 여성들은 그와는 분리된 트랙, 소위 마미 트랙을 밟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예 직장을 떠나는 것보다는 여성들의 능력을 활용하게 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제안된 내용이지만 당시 큰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한번 마미 트랙을 선택하고 난 다음에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사실상의 경력 포기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가족을 위한 경력 희생을 ‘엄마’에 한정시키는 전제도 원성을 샀다. 여성 개인의 입장을 떠나 기업 입장에서도 더 발전 가능성이 있는 인재의 커리어 전환은 인재활용 측면에서 최선의 결과는 아니다. 이후 슈바르츠는 여성에게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육아 때문에 커리어 개발을 기꺼이 포기할 여성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해묵은 논쟁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국내 주요 일간지에 마치 여성인력 문제의 새로운 대안인 것처럼 소개되는 등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선택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전문가들은 인재 개발 차원에서 마미 트랙은 마미 트랩(mommy trap, 엄마들의 덫)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장기 육아 휴직이 일반적이어서 여성 경제참가율이 매우 높은 북유럽 국가들의 모델도 경력 단절 기간이 길어지는 데 따른 복귀 이후의 타 직원들과의 격차는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미국의 샌드라 데이 오코너 전 연방 대법관도 세 아들의 육아를 위해 마미 트랙을 받아들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4년 만에 마미 트랙에서 벗어나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 자리에 오른다. 만일 그녀가 마미 트랙으로 커리어를 마무리 지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였을 것이다. 장기 휴직이든 단축 근무든 유연 근무제가 자리잡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한시적'인 것이어야 하고 돌아갈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실질적인 활용률도 낮을뿐더러 '유리천장'을 정당화시키는 사례들만 증가할 것이다.

시간을 재단하는 새로운 일의 방식, 스마트워크

조선시대 명기 황진이는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었다가 나중에 펴 쓰고 싶다'고 노래했다.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하고 싶은 마음은 세계적으로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모든 근로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최근 유연 근무제의 새로운 방식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스마트워크가 대안이 될 수 있다. IT 기술을 이용해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의 상황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시간을 활용하게 하는 것이다. 영국의 브리티시텔레콤은 직원의 87%가 참여하는 'BT 워크 스타일'이라는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이래 업무 생산성이 20∼60% 개선되었고 산후 휴가 복귀율도 업계 평균의 2배인 99%까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에 전체적인 업무 시간을 줄이거나 일정기간 일을 떠나는 것이 불가피했던 여성들도 스마트워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업무 공백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스마트워크가 자리잡으면 일하는 장소뿐 아니라 일하고 소통하는 방식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회식이 아니더라도 전문성에 의한 네트워킹 형성이 가능해져 여성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스마트워크 하면 흔히 재택근무를 떠올리지만, 사실 재택근무는 개인의 시간활용 자유도가 높아졌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업무 성격과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개별 가정에 스마트워크 인프라를 갖춰야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생활 공간과 업무 공간이 분리되지 않아 업무 집중도가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현실적으로 가족에서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여성들에게는 이중노동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보다 바람직한 형태는 각 주거지 인근, 다양한 생활권에 구축된 스마트워크 센터에서 작업하는 것이다. 스마트워크 도입 비율이 높은 네덜란드는 정부, 비영리단체, 민간 등 다양한 주체들이 스마트워크센터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관공서의 유휴 공간을 스마트워크센터로 활용하기도 한다.

사실 제도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 제도 정착에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는 것은 IT 시스템이나 스마트워크센터 구축보다 새로운 업무 방식에 대한 문화적 적응이다. 지난 6월, 스마트워크를 도입한지 1년 반 정도 된 네덜란드 통신회사 KPN을 방문했을 때, 사무실은 주말처럼 한산했다. 이곳에서 만난 한 여성 직원은 도입 후 1년 정도 까지는 관리자나 직원 모두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상사가 직원들을 눈 앞에서 관리할 수 없는 것이 불안해 업무를 매우 세부적인 부분까지 일일이 지시, 관리하기 시작하고 자주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명확한 업무 평가 기준이 마련되고 새로운 업무 방식으로도 일이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음을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KPN, Microsoft 등 일찌감치 스마트워크를 도입하고 있는 기업들이 하나같이 강조하는 것은 결과에 입각한 투명한 성과 평가 기준과 문화다.

'여성'을 위한 제도에서 '가족'과 '근로자'를 위한 제도로

여성관련 제도들의 사용률이 낮은 원인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제도가 너무 여성에 초점을 맞춘 데 있다. 일례로 모성보호제도는 직장에 다니는 기혼여성들의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로 주로 여성을 직접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얼핏 여성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것 같은 제도들이 어쩌면 공공연하게 여성들에게 더 무거운 짐을 부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가족을 돌보는 책임은 엄마들뿐 아니라 아빠들에게도 있다. 실제로 개개인의 적성과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기존의 성 역할을 초월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미국 경제지 포춘은 아내의 성공을 내조하는 '트로피 남편'이 증가하고 있어 이들을 위한 직장 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기사를 소개했다. HP의 CEO였던 칼리 피오리나의 남편은 아내가 MIT 경영대학원에 입학할때부터 두 딸의 양육과 가사를 맡았고 맥 휘트먼 전 eBay CEO의 남편도 가족을 돌보기 위해 의사일을 그만뒀다. 노르웨이 총리 그로 할렘 브룬틀란의 남편도 대표적인 트로피 남편이다. 미국 여성 CEO 중 30%가 트로피 남편을 뒀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 못지 않게 가부장적인 일본에서도 육아를 적극적으로 돕는 남성을 가리키는 신조어 '이쿠맨(イクメン)' 이 2010년의 베스트 유행어에 뽑혔다. 우리 나라도 점점 '딸 바보'와 같이 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남성상이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제도들은 다양성 인정과는 거리가 멀다. 지난해 전업 주부인 남자가 카드 발급을 신청했다가 '남자는 주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카드회사에서 발급을 거부당한 사건이 있었다.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 권고를 받기는 했지만 우리 사회에 '제도적'으로 각인된 성 역할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워킹맘이 회사 일과 가정 일 모두를 해내느라 씨름하는 동안 워킹대디는 육아에 적극 참여하고 싶어도 제도적 제약과 편견 때문에 역차별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성보호제도가 가족보호제도로 이름을 바꾸고 남녀 모두가 활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여전히 제도를 주로 활용하는 쪽은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해도 여성 문제 해결에 있어 중요한 것이 인식 개선인데 하물며 제도가 다양한 생각과 라이프스타일을 가로막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스웨덴은 1974년 육아휴직제도를 '부모휴가제도'로 개정, 부부 공동양육 모델을 제시했다. 아빠도 반드시 2개월은 휴직해서 아이를 돌봐야 하며 부부가 육아휴직을 절반씩 쓰면 '성평등 보너스'로 월 일정액을 지급한다. 노르웨이는 자녀 생후 1년 내 아버지에게 6주간의 유급휴가가 주어지며 85% 이상의 남성이 이를 사용한다.

사실 여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논의되는 변화의 상당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 근로자의 비중이 높은 화학기업 바스프는 직원들의 장기 근속을 독려하기 위해 가족친화제도에 주력했다. 근로자 자녀가 방학 중 혼자 집에 있지 않도록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전문 보모가 3세 미만의 아기를 돌봐주는 사내 보육원을 운영한다. 여성 직원뿐 아니라 일하는 아내를 둔 남성 직원들의 충성도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스마트워크와 같은 제도도 일차적인 수혜자로 논의되는 것은 여성이지만 사실 신세대 인재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도 필요한 제도다. 베인앤 컴퍼니의 조사에 따르면 86%의 신세대들이 업무 유연성이 높은 근무 환경을 지지했다. 전문성 있는 고령 은퇴자들을 활용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이미 HP, IBM, 인텔 등은 부모뿐 아니라 전 직원에게 유연 근무제를 허가하고 있다. 단순히 여성 근로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모든 근로자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차원에서 문제를 접근해야 할 것이다.

리더급 여성의 육성 - 멘토십을 넘어 스폰서십으로

고위직에 여성 관리자들이 일정규모 이상 존재하는 것은 조직 내 여성인력들의 동기 부여와 여성 친화적인 문화 형성을 위해 긍정적이다. 하지만 여성할당제와 같은 인위적 채우기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여성 리더십의 경우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사례가 부족해 몇몇의 실패가 '여성 리더의 한계'와 같은 성급한 일반화로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노르웨이에서는 이사회에서 여성 임원들의 수를 늘리기 위해 할당제를 도입한 결과 2003년 9%에 불과하던 여성 임원의 수가 5년 만에 40%로 성장했다. 하지만 수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강제로 할당된 수를 채우려다 보니 예전 이사진보다 경험이 적은 인물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포함되기도 했던 것이다. 준비 없는 할당제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따라서 갑자기 사다리의 위쪽을 채우려기 보다는 중간 관리자 이상급부터 차근차근 인재들이 양성되도록 해야 한다. 바람직한 변화 과정은 여성들에게 적합한 육성 방안을 찾는 것에서 시작한다. 개인적인 조언 수준의 멘토링을 넘어서 조직 차원에서 여성을 육성해 줄 수 있는 스폰서십이 필요한 이유다. 펩시는 여성 인재의 누수를 관리하기 위해 모든 직급에서 여성직원들의 경력 발전 과정을 추적, 관리한다. 타임 워너는 부서 내 다양성 관리 성과를 측정해 이를 관리자의 성과 측정과 보상에 반영하고 있다. 전체 직원 중 60% 이상, 임원급의 30% 이상이 여성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사는 조직에서 남녀가 서로의 사고, 의사소통, 협상, 갈등 해결 방식 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양성 이해(Gender Intelligence)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여성 지도자 후보들을 위한 맞춤형 커리어 관리를 해 주는 별도의 스폰서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4. 양성 언어(Gender Bilingual)를 구사하는 기업이 되자

여성과 남성은 평균적인 성향이나 강점, 라이프 사이클 등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기존의 남성 중심 업무 문화, 경력 설계, 보상 체계에서 벗어나 여성들도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직업을 선택할 때 '흥미'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높다고 한다. 대신 사내정치 등을 소모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조직에서 직위에 대한 욕심보다 전문성에 대한 인정을 추구한다고 한다. 획일적인 성과 보상이나 직위 보상이 아닌 여성들을 위한 동기부여 방안을 찾아야 한다.

가정친화 프로그램의 운영은 여성 직원에 대한 배려 차원을 넘어 조직 내에서 존중 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어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 더욱이 전 가구의 1/3이 맞벌이 가구인 현실에서 여성 직원뿐 아니라 남성 직원들도 혜택을 얻을 수 있어 효과측면에서 고려해 볼만한 투자다. 포드 자동차는 아이가 아파서 학교에 갈 수 없거나 갑작스러운 출장이나 초과 근무가 필요한 경우, 24시간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전문 보육사를 연결시켜 준다. 남성 근로자 비중이 높은 장치 사업인 화학기업 바스프도 직원들의 이직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족친화정책에 초점을 맞추었다. 방학 중 혼자 집에 있는 근로자 자녀를 위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또 전문 보모가 3세 미만의 아기를 돌봐주는 사내 보육원을 운영한다.

지난해 말 기준 서울시내 국공립 보육시설 대기자 수는 32만 4천 명으로 보육원 하나당 대기자가 평균 159명이다. 이 정도면 아이가 생긴 것을 확인하자마자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보육시스템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보육 정책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인재들이 대안을 찾지 못해 직장을 그만둔다면 이는 기업에도 큰 손실이다. 인재 파이프라인에서 누수되고 있는 여성 인재들은 사실은 경쟁력의 누수일 수 있다. 미래 인재전쟁 시대, 남녀 인재 모두의 역량을 활용할 수 있는 양성 언어(Gender Bilingual) 구사가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다.[LG경제연구원 정지혜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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