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특히 일본계은행의 국내진출을 통한 우리나라 상권의 지배에 속박을 받은 한국인들은 우리 상공업자의 권익보호를 위하여 민족자본에 의한 근대적 금융기관의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이에 따라 갑오경장(1894년) 이후 조선은행, 조흥은행, 제국은행 등이 설립됐으나 자본력 부족으로 1년도 못되어 모두 폐점했다.
다만 한성은행(1897년), 대한천일은행(1899년) 및 한일은행(1906년)만이 본격적인 민족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그러나 금융기관들이 당시 재정혼란으로 외국자본이 필요하게 된 한국정부에 제일은행자금을 융통하여 주거나 정부에 대한 상납자금을 보관하는 등의 부수적인 임무에 주력하게 되자 정부는 1906년에 은행조례를 공포하여 한성은행에 10만원, 천일은행에 22만5천원을 무상으로 대출함으로써 업무의 정상화를 기함과 동시에 경영면에도 깊히 관여하게 된다.
그 후 두 은행은 몇차례의 조직변경등을 거쳐 조흥은행 및 한국상업은행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조흥은행은 신한은행, 한국상업은행은 우리은행으로 금융역사를 이어가게 된다.
한편, 1906년에는 지방농공업자에 대한 금융지원을 통하여 한국의 산업발전에 기여토록 한다는 목적하에 3월 농공은행 조례가 제정됐다. 조례에 따라 정부는 전국에 각 관찰도 단위로 농공은행을 설립했다.
그후 농공은행은 산업입지및 교통조건 등을 참조하여 한성, 평양, 대구, 전주, 광주, 및 원산의 6개소로 정비 통합됐으며, 그 휘하에 지점 출장소는 27개에 달했다.
이후 1907년 5월 지방금융령이 제정되어 각지역의 지방금융조합이 설립됐다. 이 조합은 독일의 라이파이젠이 제창한 농촌신용조합을 우리나라 농촌에 도입한 것이었다.
그후 지방금융조합은 1914년 5월 개정된 지방금융조합령에 의하여 도시에도 설치됐으며, 도시와 농촌에 산재하고 있는 이들 조합의 중추기관으로서 각도별연합회가 구성됐는데 이 연합회에 대하여는 식산은행이 자금공급을 전담했다.
또한 1908년 8월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 공포되고 다음해 1월부터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영업을 개시했다. 이 회사는 금융조합과 더불어 금융기관으로서의 성격 보다는 국책회사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회사는 일본이 우리나라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권 착취를 위해 설립한 국책 회사로 인도를 식민지화했던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떠 만든 회사이다.
주요업무는 한국의 농업척식에 필요한 자금공급이었으나 정기예금의 수입등 기타 부대업무 뿐 아니라만주몽골지역 등 새로운 개척지에 진출한 일본이민들에 대한 자금공급업무까지 담당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한 금융기관은 일본 제일은행이다. 제일은행은 1904년 구 한국정부와 국고급취급에 관한 게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고금취급업무를 전담하게 됐고 이어 1905년에는 화폐정리에 관한 사무를 위임받아 우리나라의 유일한 발권은행으로서의 기능까지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의 권리에 속하는 은행권발행특권을 외국의 1개 사립은행에 맡길 수 없으므로 한국정부는 일본 총독부와 협의하여 1909년 7월 한국은행조례를 공포하고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같은해 10월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인 구 한국은행이 공칭자본금 1천만원으로 업무를 개시하게 된다.
일본계 제일은행은 그때까지의 화폐발행액과 경성 및 부산의 두 지점을 제외한 모든 지점 및 출장소를 한국은행에 이양하고 원래의 일반은행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후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일제는 본격적인 경제적 침탈거점으로로서의 금융제도 재편작업에 착수했다. 그 첫 단계로서 1911년 2월에는 조선은행법을 공포하고 같은해 8월1일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변경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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