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實事求是, 自助精神으로 세계를 향해 뛰겠습니다”
다산, “實事求是, 自助精神으로 세계를 향해 뛰겠습니다”
  • 류재복 大記者
  • 승인 2011.07.1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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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칭다오' 이곳은 한중 수교" 후 한국의 기업인들이 대거 진출을 하여 중국내에서 가장 한국인 기업들이 많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한때는 1만여개의 한국기업이 들어가 사업을 했지만 IMF 등 금융위기가 몰아닥치면서 많은 기업들이 도산되었고 심지어는 몰래 야반도주를 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던 곳이다.

그런 그곳에서 악세사리 전문 생산업체의 명성을 떨치며 한중 수교전인 1990년에 창업, 20년을 한결같이 한 업종에만 몰두하여 중국 칭다오에서 성공한 기업과 기업인이 있다. 그곳이 바로 서울에 본사가 있는 (주)다산의 계열사인 칭다오 현지법인 ‘청도다산’과 ‘청도다산’을 탄생시킨 윤영상 (주)다산 회장이다.

(주)다산 윤영산 회장는 1978년에 서울에서 창립, 지난 32년간 동, 동합금, 기초소재와 악세사리(신변장신구)를 생산하여 판매하고 있는 대표적인 중견 기업이다. 국내에서는 현재 시화공단과 반월공단에 연간 3만톤 규모의 동관, 동합금선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고 특히 식음용수 동관에 대한 미국 FDA 인증을 받아 미주지역 등 60여 국가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패션 악세사리를 선도하는 인재중심의 일류기업, 다산의 제품은 세계최고를 추구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윤영상 회장이 칭다오에 현지법인으로 세운 ‘청도다산’은 현재 칭다오시 청양구에 소재하고 있다. 1990년 8월 16일에 788만 불을 투자, 악세사리 제조를 전문으로 세운 이곳 회사는 현재 생산, 관리직을 포함한 650여명의 직원들이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다.

관리직은 한국인들이 맡고 있고 생산현장에서의 간부들은 동포들이 맡아서 일들을 꼼꼼히 챙기고 있다. 이곳 현지의 법인장인 총경리는 윤대영 사장으로 윤 회장의 아들이다. 이곳 공장에서는 약 2만여 종의 악세사리를 제조, 생산, 판매를 하고 있으며 창립 이듬해인 1991년 11월에 총수출 140만$달성, 2000년 12월에는 1,000만$을 달성했으며 2006년에는 ‘올해의 공예인상’, 2009년에는 청도시인민정부 시장상을 윤 회장이 수상하기도 했다.

1990년, 788만불 투자로 창립,전 세계 60여 국가에 악세사리 수출1990년 한국기업들이 중국의 시장잠재력을 간과하던 시절, 그는 오히려 중국에서의 기회를 발견하고 남보다 한발 앞서 중국 칭다오로 진출을 했다. 그는 지금도 중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면서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칭다오에 현지법인 ‘청도다산인조수식유한공사’를 세우고 중국에서의 기회를 현실로 바꾸어 나가는데 주력하고 있는 그는 현재 수출 3천만 불 달성을 앞두고 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그는 20년 전 당시 중국투자의 결심에 대한 배경을 묻자 그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외투자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중국은 투자유치 정책에서 경쟁력이 있었고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 내수시장의 잠재력이 있었기에 투자지역으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기자는 윤 회장의 안내를 받으면서 공장 전체를 둘러보았는데 곳곳에서 단계별로 생산라인이 가동되고 있었고 하나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원자재를 비롯 한 모든것은 (주)다산에서 생산되는 자재들로 사용되는 등 외부의 협력사 없이 독자적인 경영을 하고 있기에 20년이란 길을 탄탄히 걸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고향이 칭다오로 모두가 창업 멤버로 함께 지내온 사이로 노사의 단합과 협력이 강했기에 성공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성공적 운영의 방법을 윤 회장에게 묻자 그는 “우선은 현지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기에 해마다 회사 창립기념일에 체육대회, 노래자랑과 같은 각종 단합대회를 열어주었고 중국정부가 추진하는 일에는 다른 기업보다도 더 일찍 앞장서서 협조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공공사업과 사회적 공헌에도 앞장을 서 왔지요.”

윤 회장은 칭다오시내에 38,000평방m의 부지를 마련, 건물 15,000평방m의 규모로 현대식 신 공장을 지어놓고 곧 이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중국정부의 정책변화로 한국기업들이 중국을 떠나고 있는 현실에서 이처럼 거대자금을 투자하여 새로운 경영을 준비 한다는것은 그리 간단치는 않는 일이기에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신공장의 건설은 1992년 한국의 시화공단에 공장을 신축한 이래로 가장 큰 금액의 단일의 투자 사업이며 앞으로 이 신 공장에 동가공사업, 고부가가치 악세사리 사업을 비롯하여 신성장 동력을 제공할 신사업부가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위대한 모험정신으로 과감하게 중국시장을 독점했던 20년전의 창업정신을 기억하고 다시 한번 중국과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도전의 발걸음을 내딛겠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중국을 보기 전에 이미 중국으로 시야를 돌려서 성공을 한 그가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중국을 떠나려 하는 이 시기에 오히려 기회로 잡고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은 그만이 실천 할 수 있는 강한 도전과 용기의 정신이었다.

중국사업의 성공은 현지인과의 친교가 중요 세계를 향한 도전으로 재투자, 신 공장 건설 청도'다산'은 이제 중국 각지에 사업장을 확대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여 중국에서도 으뜸가는 선진기업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악세사리 업계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칭다오에 진출할 당시만 해도 주위에서 많은 우려들을 했지만 청도다산은 현재 다산메탈과 더불어 청도지역의 악세사리 대표기업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값싼 노동력, 무한한 시장 잠재력으로 인해 세계의 기업들이 중국으로 몰려 들었고, 중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저가의 상품 공급원이 돼 왔다. 그러나 최근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강화를 비롯한 중국정부의 정책변화로 인해 중국에 진출했던 기업들의 경영환경이 크게 악화되자 일부 한국기업은 중국을 많이 떠났고 지금도 사업을 접고 있는 실정이다.

1990년, 중국시장 진출에 성공한 윤 회장은 이어 개성공단에도 진출을 했지만 남북의 경색된 분위기로 현재는 활발치는 못하나 곧 그 꿈을 펼치기 위해 준비 중에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중국 다음으로 기회의 땅을 베트남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 회장은 제조업이 서비스업으로 진화하는 가운데 한국이 3만불 달성을 위해서는 개성공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지난 2007년 6월, 개성공업지구에 10,700평의 토지를 분양받고 개성에 진출을 꾀했다.

그러나 남측의 정권이 바뀌면서 대북정책에 변화가 있어 아직은 그의 꿈대로 실현이 되지는 않고 있지만 곧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다짐을 하고 있다.

윤 회장에게 개성공단의 진출 계획을 묻자 그는 “개성에는 우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감정을 느끼고, 성실한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유능한 인력들이 있었고 이런 좋은 인력을 저렴한 비용으로 구할 수 있다는 큰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죠.”라고 말하면서 그는 또 “이런 인력은 중국의 현지 직원들처럼 단순노동만 시킬 생각은 없고 고부가가치 지식노동자와 양질의 관리 인력으로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개성공단에서 제2의 꿈 실현시키려 준비 다산의 사상에 심취, 회사명 정해

윤 회장은 앞으로 개성공단의 분양받은 땅에 동파이프, 동선공장 및 미세동선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며 이를 위한 200억 원의 사업비 조달에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20년간 사업을 해 오면서 이제는 안정적으로 지낼 만도 한데 그가 여전히 도전을 즐기고 있는 것은 중국에서의 오랜 생활경험과 체험이 스피드와 선점의 중요성을 가르쳤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개성공단에서 성공을 해 보겠다는 야심이 있다.

“통일은 언젠가는 될 껍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통일이 되기를 기다릴 수 는 없습니다. 개성에 투자를 하여 남북 간에 평화체제가 항구적으로 만들어 나가면 남북이 서로가 잘되는 상생의 윈윈이 되는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제 우리는 북한을 포용하는 자세를 갖고 또 우리에게 프리미엄이 되고 한국의 신용도 상승에 주요 원인이 되도록 우리 기업인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할 때 입니다.” 그의 대북관은 반드시 대북사업에서도 성공을 할 수 있는 기질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매사에 항상 배움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에 있는 ‘청도다산’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화 때문이라고 했다. 즉 중국현지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으로 ‘사람’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기업의 영속을 위한 사람의 중요성은 누구나 인식하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성을 알면서도 관리의 노하우는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35년간 조찬모임을 이어오는 인간개발연구원에
문을 두드린 것이다. 윤 회장이 인간개발연구원의 조찬포럼에 첫 참석을 한 것은 1982년_. 당시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춘계세미나에 참석을 했으니 이제는 장수 회원 겸 고참 회원이 된 셈이다. “대학에서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경영에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많은 공부를 했지만 진정한 경영학습이 시작 된 것은 인간개발연구원에서 였습니다. 매주 목요일에 실시된 조찬세미나를 통해 배운 지식들이 제 개인 과 회사의 성장,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서울에서 매주 꼭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만 인간개발연구원은 제게 최고의 MBA라고 생각합니다.

(주)다산은 윤 회장이 정한 회사의 이름이다. 그는 왜 정약용의 호인 ‘다산’이란 회사명을 썼을까? 그는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감명을 받아 다산 전도사로 활동을 하고 있다.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도 다산의 저서인 목민심서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기도 했다. “어린시절, 고향에 있는 다산초당을 놀이터 삼아 저는 성장을 했습니다. 6대조 조부님이 다산 선생의 18명 제자 가운데 한분으로 다산과 함께 실학사상을 확립했던 윤종진 어른 입니다. 그래서 종손인 저로서도 다산의 삶이 바로 저의 일부분이 되었지요”

윤 회장의 고향인 전남 강진에는 아직도 그가 태어나서 살아온 그의 자택이 있다. 그리고 그의 집 위에 바로 다산초당이 있다. 그의 생가인 집터가 생전에 다산 선생이 직접 정해준 자리라는 것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며 또한 200년이 넘은 그의 생가는 역사적인 집 터라고 볼 수 있다.

<나와, 회사, 그리고 나라가 즐겁고 모든 사람이 즐거우며 인재를 아껴 국가에 봉사한다.>는 ‘三喜三樂의 정신’을 사시(社是)로 내걸고 있는 ‘청도다산’은 우수한 품질과 디자인의 패션주얼리 회사로서 전 세계 유수의 패션회사와 공고한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성장, 최고의 첨단기술, 고객을 만족하게 한다는 고품질을 추구하면서 세계인들에게 사랑받은 일류기업으로 성장하고자 오늘도 힘차게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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