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금융인맥③]3공 중정에서 은행장 후보 선별, 은행장 임명은 재무장관이 결정
[한국의 금융인맥③]3공 중정에서 은행장 후보 선별, 은행장 임명은 재무장관이 결정
  • 임권택 기자
  • 승인 2018.01.1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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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 적격자 명단도 중정 결정... 은행장이 순서대로 임원 결정
[파이낸셜신문-임권택 기자]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여지없이 돈줄을 쥐고 있는 한국은행에도 군인들이 찾아와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방출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방문한 군인은 다름 아닌 김종필씨였다. 이렇게 권력은 금융계와 연결, 관치금융, 정치금융이 시작된다.
 
▲  1971년 9월10일 북악터널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내외, 맨 오른쪽이 한국신탁은행 김진흥 은행장(출처=월간은행계) 
 
군사혁명위원회는 ‘전국금융기관 동결령’을 발표했으며 며칠 뒤인 5월20일 새 내각을 발표했다.
 
재무장관에 백선진, 한국은행 총재에 유창순, 재무차관에 이한빈, 농업은행 총재에 박동규, 한은감독관에 김희곤, 산업은행 총재에 이필석, 한은 부총재에 문상철을 임명했다.
 
시중은행에게 넘겨줬던 은행들은 금융인이나 일반주주 의지와 상관없이 정부에 귀속, 관치금융이 본격적으로 출발하게 된다.
 
이러한 국영은행 시대는 5공화국 시절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민영화를 단행하기까지 20여년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당시 금융계 인사들은 언제 어떻게 목이 달아날지 파리 목숨 시대였다. 유창순 한은 총재는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퇴진했고 이필석 산은 총재는 7일만에 체포됐다.
 
당시 시중은행장 후보명단은 김종필이 이끄는 중앙정보부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은행장 후보들을 선정하면 은행장 임명은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김유택씨가 담당했다.
 
초기 김유택 장관은 조흥은행장에 이호상, 상업은행장에 문종건, 제일은행장에 민병도, 한일은행장에 김세련, 서울은행장에 이보형을 임명했다.
 
당시 눈에 띄는 인사로 제일은행 상무 이보형씨이다. 그는 동생인 이지형 장군이 친분이 있던 박정희에게 소개해서 결국 서울은행장으로 가게 된다.
 
임원 선임도 비슷하다. 임원 적격자 명단은 중정에서 맡고 김유택 장관이 은행장을 불러 명단을 놓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차례대로 골랐고 은행 설립이 일천한 서울은행장은 나머지 사람을 맡았다.
 
결국 은행장이나 은행 임원이 되기 위해서는 중앙정보부와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이들 위세가 얼마나 당당했는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다. 이때부터 ‘인사로비’라는 말이 생겨났다.
 
당시 은행인사들의 임기를 보면 한국은행 유창순 총재 1년, 한국은행 민병도 총재 1년, 산업은행 이필석 총재 7일, 산업은행 나익진 총재 7개월, 조흥은행 이호상 행장 4개월, 한일은행 김세련 행장 7개월, 제일은행 민병도 행장 11개월, 서울은행 이보형 행장 5개월이었다.
 
60년에 들어서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처음 실시됨에 따라 이를 효율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금융제도면에서 커다란 변혁이 이루어 졌다. 즉 1950년대 후반 민영화이후 이병철씨등 소수 재벌에 의해 지배되어 온 일반은행의 주식이 부정축재재산 환수처리의 일환으로 정부에 귀속 됐다.
 
62년에 개정된 한은법은 정부통제를 노골화하기 위한 법 개정이었다. 금융통화위원회의 이름은 ‘금융통화운영위원회’로 바꿨다. 또 금통운위의 결정 사항에 대해 재무부 장관이 재의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재의 요구가 부결될 경우를 대비하여 아예 위원회의 결정권을 국무회의에서 최종 결정하도록 했다. 금융통화운영위원의 수는 7명에서 9명으로 늘렸고, 정부 추천 몫은 2명에서 5명으로 늘려 정부개입의 문을 열어 활짝 열어 놨다.
 
한마디로 정부가 맘대로 한국은행을 좌지우지 하겠다는 얘기인 셈이다.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이러한 한은법 개정으로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정부는 고도성장에 필요한 내자동원을 원활히 하기 위해 금융기구 확충도 서둘렀다. 이에 따라 농업협동조합 1961년, 중소기업은행 1961년, 한국외환은행 1967년, 한국주택은행 1969년 등 특수은행이 대거 설립됐다.
 
또한 경제개발에 필요한 민간자본동원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증권거래법과 보험업법(1962년)이 제정됐다.
 
지방경제의 활성화를 위하여 대구은행, 부산은행 등 지방은행 설립(1967년)이 됐다.
 
경제개발을 원활하게 지원하기 위한 금융기관 등 금융조직개편이 완성됨에 따라 1970년대 한국경제 성장을 위한 금융체제가 완성을 보게 된다.
 
국영은행 시대이다 보니 은행의 부실 채권은 은행 공동의 책임이 되는 희한한 금융논리가 5공까지 이어지게 된다.
 
어느 시중은행의 부실채권이 발생하면 5개 시중은행이 공동으로 분담하여 해결하는 구조이다.
 
60년대 인사는 본인도 모른 상태에서 발령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은행계 발행인으로 있던 고김병석의 ‘인물은행사’에 게재된 이필석 총재의 회고담이다.
 
당시 상업은행장으로 재직하던 이필석 은행장은 출근 길에 신문기사를 보고 본인이 산업은행 총재로 발령난 사실을 알게 될 정도이다. 당시의 인사는 대략 그런 식이다.
 
당시 최고회의 부의장 겸 인사위원장 이주일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인사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학계, 재계, 금융계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이필석 총재가 1위였다고 한다.
 
이런 식의 인사는 70년대 들어서면서 서서히 학연, 지연, 혈연의 인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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